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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hine Feb 29. 2024

미워하거나 미움받거나

with 미움

 

                                                                             미움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에티카- 



    

표지 그림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무언가를 노려보며 젓가락을 든 채로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다. 톡 튀어나온 목에는 생선 가시가 걸려 있다. 내 목이 간질간질하니 움직일 때마다 콕콕 찌르는 것 같다. 목에 걸린 가시가 말한다. “꼴도 보기 싫어.” 


사실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꽤 많다. 엄마는 출근하고 할머니가 돌봐주던 어린 시절, 유독 나를 구박하던 할머니를 미워했다. 뒷집에 살던 같은 반 친구 은서는 교양 있는 엄마와 멋진 아빠와 함께 살았다. 나보다 얼굴도 못생기고 공부도 못하는 아이가 부모에게 사랑받는 것이 부러웠다. 나를 졸병처럼 부리던 은서가 미웠다. 언니니까, 동생이니까 이해하라고 나에게만 요구하던 엄마를 미워했다. 나는 마음에 미움이 가득 찬 사람이었다. 마음 가득 미움이 가득 차 풍선처럼 터져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다. 나는 분명히 죽어서 지옥에 갈 것으로 생각했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미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그 앞에서 나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작은 방에 세 들어 살며 공장 다니던 아줌마를 좋아했고 나에게 예쁘다, 착하다고 말해주던 세탁소 아저씨를 좋아했다. 그들 앞에서는 미움이라는 감정이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미움은 살아있는 나를 좀 먹어 결국은 죽게 만드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미워하다 미워하다 결국 나도 상대도 파괴하게 되니 말이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감정. 이런 무서움을 직감했는지 나는 미움의 반감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고자 애쓰며 살아왔다. 나를 무조건 지지해 주시는 시어머니를 좋아했고 내 안의 잠재력을 보고 감탄해 주는 동료를 좋아했고 남편과 자식을 조건 없이 좋아했다. 지금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좋아하는 감정의 저울이 더 무거워지기를 소망하고 있다. 

사랑하는 감정을 숨길 수 없듯이 미워하는 마음을 숨기는 것은 참 어렵다. 이미 표정에서, 말에서 미움은 묻어 나온다. 미움이 생겼다는 것은 마음이 다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이 다친다는 것은 마음의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비교를 당할 때, 비난을 받을 때,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면서 부정적인 생각으로 나를 몰아갈 때 상처가 생긴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도미노처럼 걷잡을 수 없이 와르르 무너져버리게 된다. 그렇지만 마음이 아프다는 말은 쉽게 하지 못한다.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면 미움이 되고 분노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너 같은 거 꼴도 보기 싫어! 이런 말을 들었어.”로 시작하는 그림책 ‘미움’은 떠나는 듯한 뒷모습이 보이는 그림으로 시작한다. 오물을 버리듯 감정을 쏟아내고 돌아선 모습이다. 이제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일은 남아있는 자의 몫이다. 주인공은 말한다. “나도 너를 미워하기로 했어.” 그래서 주인공은 밥을 먹으면서, 신나게 놀면서, 목욕을 하면서,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 서조차 미워한다. 미움은 복수심의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에게 미움으로 복수하는 것이다. 이제 마음은 온통 미움으로 꽉 차버린다. 누군가를 미워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미운 사람을 계속 떠올리면서 괴로워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종종 우리네 인생을 드라마에 비유한다. 드라마는 주인공과 대립하는 악역이 존재함으로써 더 드라마틱해진다. 그런데 어떤 드라마든 악역을 자세히 관찰하면 주인공의 숨겨진 인격을 대변하는 존재인 경우가 많다.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가 형상화되어 주인공과 대립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드라마에서 악역의 역할이지 싶다. 결국 악역은 억압된 나의 욕망이 투영되기에 더 크게 미워하고 파괴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악역을 미워하고 분노함으로써 내면의 어두운 인격을 억압하고 조절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악역도 내 삶에서 중요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내 안의 그림자를 형상화해 주는 존재이니 말이다. 


나는 지금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어릴 적 뒷집 살던 은서와 나를 구박하던 할머니는 더 이상 미워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내 인생에서 이미 떠나 있기에 용서와 복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외적 원인을 미워함으로써 나를 돌보는 패턴은 지속되고 있다. 나를 돌보기 위한 방어 수단으로 나를 합리화하기 위한 기제로 미움은 여전히 그림자로 내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은 잠을 잘 때, 신나게 놀 때, 행복할 때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몸서리치게 미움의 감정에 휩싸이기는 하지만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나와 상대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때는 받은 대로 돌려주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미움이라는 감정도 나에게 있는 하나의 욕구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움받는 사람이다. 언니도 나를 미워하고 있고 동서도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마치 나를 파괴하려는 듯 달려들었다. 그들 앞에서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였는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들 외에도 대놓고 나를 미워한다고 표현하지 않을 뿐,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있을 것을 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상처받을까 두려워 방어했을 것이고, 내가 무너질까 두려워 나를 보호하기 위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굴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계를 세우고 다가오는 이들을 거부했던 나와 잘난 척과 모르는 척으로 상대와 나를 분리했던 시간도 기억한다. 


미움받는 것은 미워하는 것만큼 아프다. 내가 가진 작은 행복과 평안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들의 감정은 번개를 동반한 벼락과도 같다. 마치 제우스가 창을 휘두르듯 천둥처럼 휘몰아치며 에너지를 생성한다. 그것을 맞아내며 견디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왜 나를 이토록 미워하는가. 생각하고 또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말해주었다면 답을 찾을 수 있었을까. 나는 나를 향한 그들의 미움은 시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그들의 무의식적 갈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를 볼 때마다 불러일으켜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그들의 몫이리라. 그것을 알아냈다면 조금 더 자기 내면에 다가갔을 텐데 마음 아픈 일이다. 합리적 사고로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너그럽게 받아낼 만큼 나는 그렇게 완벽한 존재는 아니었다. 인생은 이처럼 자신의 불완전함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복수를 선택하든 용서를 선택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이미 상처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마음이 튼튼해져 면역력이 생겼기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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