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5학년 끝 무렵, 우리 가족은 서울로 상경했다.
시골에서는 꽤나 공부를 잘했다.
학년별로 전교 1등에게 ‘옥천의 별’이라고 새긴 가죽 명패를 달아줬다.
서울에서 어떤 머슴아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오기 전까지 나는 ‘옥천의 별’을 놓친 적이 없었다.
서울로 이사를 온 뒤, 6학년부터 은평국민학교를 다녔다.
응암동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로 다섯 정거장은 가야했다.
그런데 나는 버스 울렁증이 있었다.
멀미약을 먹고, 귀밑에 동그란 파스까지 붙이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래도 울렁증이 멈추지 않아 중간에 내려서 토를 한 적이 많았다.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도 6학년이 돼서야 알게 되었다.
시골은 모든 건물과 집이 단층이었다.
서울로 전학을 와서 등교하는 첫날,
나는 어지럼증 때문에 토를 하고 말았다.
6학년 1반은 4층 꼭대기에 있었다.
교실에 앉아 있는데, 교실 바닥이 빙빙 돌아가는 것 같았다.
첫날부터 조퇴를 하고 집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이 묻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설명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내게 다시 “육교 건너편에 사느냐”고 물었다.
‘육교’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들었던 나는 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수업시간에도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책을 읽을 때도 사투리 억양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게 낯설었던 서울 생활은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학년 초에 작성하는 생활기록부에 ‘특기’를 쓰는 공란이 있었다.
내가 잘하는 것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또 기가 죽을 생각을 하니,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 아빠는 구세주처럼 나타나 내게 특기를 알려주었다.
“너는 주산 2단이야. 암산 천재를 아무나 하냐”
국민학교 3학년 때 주산 2단 자격증을 딸 정도로 ‘암산 천재’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읍내에 주산학원이 딱 하나 있었다. 상고에 다니는 오빠들과 함께 주산을 배웠다. 일주일에 세 번이었나. 오빠들이 학교를 마치는 시간까지 학원 앞에서 생라면으로 허기를 채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우리 마을에 살던 오빠의 자전거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고, 가끔 아빠가 마중을 나오기도 했다.
생활기록부 특기란에 ‘주산 2단’이 적히면서 나의 6학년은 탄탄대로였다.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반 친구들 시험점수를 계산해서 성적을 매기는 일을 시켰다.
그때부터 친구들은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빠가 찾아준 ‘암산 천재’ 타이틀은 내 어깨에 자신감을 달아주었다.
그 자신감은 활달하고 유쾌한 아이로 성장하게 하는 밑돌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