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부는 비, 회색
비를 사랑하는 사람이 모인다
비 오는 도서관. 빼곡히 아침이 다 채워졌다. 비를 사랑하는 사람만 죄다 모였나. 비는 시를 부르고 회색빛은 사람을 부르는 법. 피리 부는 사나이가 유유히 걸어간다. 그 뒤를 비를 닮은 이들이 뒤따른다.
올 때마다 나를 다소곳이 맞이하던 자리가 다른 이로 채워져 있다. 며칠 뜸했다고 그새 마음이 변했나. 하긴 내 자리라고 이름 써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서운해진다. 비련의 여인이 되어 다른 자리를 물색한다. 오른쪽 귀퉁이를 돌자 너른 자리가 보인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냉큼 앉는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는 노랫말처럼 자리는 다른 자리로 잊힌다.
"언젠가 마주칠 거란 생각은 했어
한눈에 그냥 알아보았어
변한 것 같아도 변한 게 없는 너
가끔 서운하니
예전 그 마음 사라졌단 게
예전 뜨겁던 약속 버린 게
무색해 진대도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만 미안해하자
다 지난 일인데
누가 누굴 아프게 했건
가끔 속절없이 날 울린
그 노래로 남은 너
잠신걸 믿었어
잠 못 이뤄 뒤척일 때도
어느덧 내 손을 잡아준
좋은 사람 생기더라 음 오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
노랫말을 속으로 흥얼거리며 책과 노트를 주섬주섬 꺼냈다. 쾌적함과 고요가 있으니까. 앉지 못한 자리도, 그림자처럼 따르는 미련도 괜찮다. (정말로)
독서대 없이 지지가능한 벽도 있다. 창이 없어 나무와 새를 볼 수 없지만 쫘악 뻗은 여백이 있다. 공간을 가로질러 중심을 튼다. 오롯이 내가 앉는다. 비따라 딸려온 글을 주섬주섬 내려놓는다.
비를 두드린다.
연못 위 파동처럼
무수히 남긴 동그라미.
크고 작은 슬픔이 토독토독 떨어진다.
15330일,
묵혀놓은 일기장일까.
나도 모르는 타인의 등허리일까.
눈물자국 남을까 부지런히 훔친다.
손마저 따뜻해 주르륵 흘리 운다.
혼자 울지 말라며 자국 마저.
흐를 새 없이 닦아주는 손.
여름비는
흐릿한 그림을 그리고
뭉개진 시야는 날숨을 내뱉는다.
가끔은,
듬성듬성 보고 흐르듯 넘기라며
고요가 내미는 것들.
귀가 눈에게 건네는 속삭임.
스타카토에게 건넨 빗방울 전주곡.
하얀 책상에서 하얀 종이에 하얀 마음을 담는다. 눈 내리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다. 비가 와서 다행인 11시다. 지금은 그어진 빗금마저 투명한 시간이다. 쓰지 않아도 시(詩)가 되는 찰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