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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경선 Oct 02. 2024

나비처럼 날아서 -28

28.

11년전 그날은 경기가 늦게 끝나 짐을 챙겨 라커룸에서 나왔을 때 11시 10분경이었다. 팀 동료와 같이 복도로 걸어 나오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혜진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3개나 왔었다. 

‘뭐 한다고 전화를 3통씩이나? 시합 있다고 말했는데.’ 요즘 계속 혜진이가 성가시게 하는 바람에 경기에 집중도 안되고 죽을 지경이었다. ‘그냥 쿨 하게 생각하면 될 건데 뭐 그리 생각이 많은 지.’ 머릿속엔 혜진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다. 

복도 반대편에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다가와서 시선을 돌렸다. 아! 혜진이었다. 갑작스런 혜진의 출현에 몹시 당황했고 가슴이 꿍꽝거렸다. ‘지금 이 시간에 뭐지? 미치겠다. 여기가 어디라고’

혜진은 나를 보더니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내고 옆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굴이 빨개지며 짜증이 확 올라 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동료한테 라커룸에 짐을 빠뜨렸다고 먼저 가 있으라고 하고 뒤돌아 혜진의 뒤를 따라붙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이 없는 지 확인하고 혜진이를 불러 멈춰 세웠다.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 따라와.” 최소한의 말만 했고 목소리는 거칠게 떨렸다. 보폭을 길게 잡아 혜진을 앞서 갔다. 1루측 방향으로 접어 들었다가 왼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실내 연습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홈팀 전용으로 간단한 피칭 훈련과 타격훈련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경기전에 연습하는 곳이라 지금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연습장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백팩 장비가방을 연습장 인조 잔디위에 던져 두고 버럭 화부터 냈다. 

이 시간에 여길 찾아오면 어떡하냐? 너 정신이 있는 거냐? 도대체 왜 이러는데? 인상을 쓰며 큰 소리로 화를 내자 혜진이도 같이 받아 쳤다. 내가 카톡을 몇 번이나 했는 줄 알아? 답장도 없고 전화는 아예 안 받고.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미안해 하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내? 혜진이는 평소와 달리 격하게 감정을 드러냈다. 

“이번주 토요일에 산부인과 같이 가야 하는 것 알고 있지?”

“시합 있어서 못 간다고 했잖아. 그냥 혼자 갔다 와. 그리고, 애는 지우라고 했는데 왜 아직 안 지웠어?”

“뭐라고? 그게 할말이야? 토요일 병원가는 이유가 뭔지나 알아?”

“뭔데?”

“힘들었지만 겨우 마음먹고 중절수술 예약했어.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한 건데, 진짜 너무하는 거 아냐?”

“어차피 난 시간 안돼.”

“경기 없는 월요일로 바꾸면 같이 갈 거야? 날자 바꿔?”

“저번에도 말했잖아. 난 얼굴이 알려져 조심해야 한다고. 결혼도 안한 프로야구 선수가 애를 지웠다고 소문나봐. 선수생활 힘들어.”

“본인이 무슨 연예인이라도 돼? 소문나면 뭐 어때. 프로야구 선수가 이미지로 살아? 실력 좋으면 되는 거지. 어이없네. 토요일은 경기 때문에 안되고 경기 없는 날은 얼굴 팔려서 안되고, 결국 같이 안 가겠다는 말이야?”

“그러게 내가 뭐랬어. 진작에 수술하라고 했잖아.”

“나 몰라라 할 땐 언제고. 참 나. 하아.” 

혜진이는 한숨을 길게 내뱉고는 눈에 힘을 주고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눈빛이라 난 당황했다.

“우리 회사에 김주연 알지? 나랑 입사동기.”

“김주연? 작년에 야구장에 같이 왔던 친구 아냐?”

“모른 척 시치미 떼지 마. 나 다 알고 있어.”

다 알다니. 설마.



이틀 전, 박혜진 회사의 부서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일주일 넘게 야근 후 갖는 술자리라 직원들은 긴장이 풀어지며 취기가 금방 올라왔다. 혜진은 뱃속의 아기 때문에 사이다만 마셨는데 주연은 술을 빨리, 많이 마셨다. 2차 맥주집에서 나와 각자 흩어져 집으로 갈 즈음에 주연은 혀가 꼬일 정도로 취했다. 

“혜진아 나랑 한잔 더해. 가지마 알았지? 한잔 더 하는 거다.”

주연은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는 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는 수없이 혜진은 주연을 끌고 근처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혜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자리에 오니 주연은 졸고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쥐어 주자 주연은 깨어나 횡설수설했다. 회사 동료, 상사 이야기에서 고객사 이야기로, 나중엔 경수 이야기도 나왔다.  

“너 경수와 그냥 친구 사이 맞지?”

“몇 번째 묻는지 모르겠네. 고등학교 동창 사이라니까. 왜?”

“경수랑 동창 사이 맞는 거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 아닌 것 맞지?”

“자꾸 했던 말 또 하게 만들어. 우린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뭔지 빨리 말해봐.” 혜진은 짜증을 내면서 재촉했다. 

“경수도 똑같이 말하더라. 너랑 동창사이지 그 이상 관계는 아니라고. 내가 물어봤거든.”

“경수랑 따로 만났어?”

“응. 사실 우리 사귀어. 너한테 말 안해서 미안. 괜찮지?”

혜진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주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갑자기 안면 근육이 실룩거리며 목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입안에 들이 붇고는 사실 관계를 확인해 들어갔다. 작년 인천 문학 야구장에서 혜진이가 먼저 가고 둘만 남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날 늦게까지 술 마시며 가까워졌고 이후 야구장에도 놀러가며 친해졌다고 했다. 

혜진은 분노했다. 당장 경수를 만나 따지고 이별을 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뱃속의 애를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연의 말은 주절주절 계속되었는데 하는 말마다 혜진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혜진과 같이 갔던 장소, 혜진한테 했던 말, 혜진에게 주었던 선물을 똑같이 주연에게도 했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잡고 토하며 엉엉 울었다. 다시 자리에 와 앉으니 주연은 술이 취해 상황파악도 안 되는 듯 배시시 웃으며 말을 했다. 

“경수가 결혼하재. 어떡해 호호.”



“주연이 사랑한다고 했다며. 딴 여자도 아니고 내 직장 동료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혜진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주연과의 관계를 다그쳤다. 부인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듣고만 있었다.

“말을 해봐. 왜 하필이면 주연이야? 그리고 결혼까지 하자고 했다며? 뱃속의 아이는 어쩌고 딴 여자와 결혼하자고 할 수가 있어?”

“...”

“정말 결혼하려고 했어? 아니지? 그럼 진짜 인간도 아니야.” 

혜진의 거침없는 원망과 분노가 잦아들 즈음 난 가야 한다고 가방을 들었다. 혜진은 어디를 가느냐고, 오늘은 결론을 내고 가야 한다며 내 옷을 잡고 막아섰다. 간다, 못 간다 실랑이를 벌이다 내가 손을 힘껏 뿌리치자 혜진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갑자기 내동댕이 쳐진 혜진이를 보니 나도 화가 치밀었다.

“왜 이래 이거. 귀찮게 왜 이리 따라붙는 거야? 자존심도 없어? 구질구질하게 정말.” 

말을 끝내고 나가는데 뒤에서 나지막한 한마디가 들렸다. “나쁜 놈. 진짜 나쁜 새끼.”

혜진의 말을 뒤로 하고 일행이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감자탕 집에서 식사하다 중간에 일어나 연경이를 만났다. 야구장 주차장에 있는 연경이 밴안에서 잠시 만나 선물을 받고 금방 헤어졌다. 연경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선물을 넣어 두려고 차 트렁크 문을 열었다. 입구 쪽에 선물 가방을 두고 문을 닫으려다 보니 안 쪽에 있던 백팩 가방이 이상했다. 가방 옆 주머니 안에 있어야 할 배팅 장갑 한 짝이 삐져 나와 있었다. 장갑을 안으로 집어 넣다가 장갑이 한 짝뿐인 걸 알게 되었다. 백팩 가방 안이며 트렁크 다 뒤져봐도 없었다. 작년 겨울 사이판에서 만나 최근에 가까워진 윤희가 선물해준 것이라 각별한 장갑이었다. 

‘이상하네. 경기 끝나고 분명히 넣었는데, 어디서 흘렸나? 라커룸? 아까 라커룸엔 분명 아무것도 없었어. 그럼 덕아웃인가?’

윤희 성격에 본인이 해준 선물을 잃어버렸다 하면 많이 실망할 것 같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멀지 않으니 가서 찾아보기로 했다. 구단 사무실 쪽 출입구를 통해 3루 덕아웃으로 빠르게 걸어 갔다. 덕아웃으로 들어서자 나무 벤치 밑부터 찾기 시작했다.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벤치 밑에 장갑 하나가 끼여 있었다.

‘휴, 다행이다. 어떻게 이런데 끼어 있냐?’

나는 안도하며 장갑을 주어 들었다. 뒤돌아 가려다 3,4미터 옆에 이상한 기척이 들려 고개를 돌렸다. 

“혜..혜진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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