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학교는 내 인생에 정말 큰 기회인가 보다. 왜냐하면 1기와 2기를 지원하려고 하니 집안에 큰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기 때는 앞서 말한 것처럼 둘째가 힘들게 태어났다. 2기 때는 부모님께 큰 변고가 있었다. 아버지가 폐 수술 후 3주간 의식이 없었고, 다행히 깨어나 퇴원했지만 다시 골반골절사고로 5주간 누워만 있어야했다. 아버지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고 옆에서 아버지를 돌보는 어머니는 정신이 나가고 무기력증에 빠져버렸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좋아지셨다.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변한다. 어쨌든 삶은 진행되어야 한다. 멈추는 삶이란 없다. 나에겐 큰 문제였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무심하게 흘러간다. 그렇게 나는 2기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나의 에세이를 공개하겠다. 지금 보면 많이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공개하는 것이 이 책의 취지에 맞을 것 같다.
1차 에세이는 ‘왜 기본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은가?’이다.
기본학교는 최진석 교수님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단련해 대한민국을 미래로 이끌어갈 인재를 기르기 위한 장치다. 여기에 내가 기본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은 모든 이유가 있다. 교수님의 존재, 나의 기본 마련, 시대의식의 각성, 이렇게 세 가지가 솥의 세 다리를 이루고 있다.
나는 최진석 교수님을 좋아한다. 사실 수년 전에 그분을 만나고 쭈욱 좋아만 했던 건 아니다. 내가 그럴 깜냥이 안 됐기 때문이다.
최근에야 교수님의 2001년 출판 도서부터 근래 도서까지 다시 읽으며 확인했다. 교수님이 지금 강조하는 얘기가 처음부터 똑같았다. 사실 교수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교수님의 말씀이 주르륵 이해가 된다. 더 신비로운 건 그에 따라 내가 변했다는 사실이다. 맞다. 수년간의 교수님과의 만남의 효과가 드디어 나타났다. 내가 변하고 있다. 내 삶에 살아있는 철학이 들어온 것이다.
교수님은 항상 강조하신다. 학문에도 인간의 삶에도 위계가 있고 차원이 있다고.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욕망에 따라 살아야 장르를 개척해서 일류가 되고 문명을 창조한다고. 우리가 그간에 지식 수입국이어서 종속적이었지만 이제는 울퉁불퉁한 현실에서 살아 날뛰는 없던 지식을 생산해야 한다고. 정치적 이념, 도덕적 결정론, 종교적 신념에 갇히지 말고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으로 우리 대한민국에게 선진, 탁월, 선도의 맛을 보여줘야 한다고.
그동안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짖어댈 뿐이었다. 다른 개가 짖으니 따라 짖을 뿐이었다. 왜 학교에 다니는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대학에 가는지, 왜 웃는지, 왜 독서하고 글을 쓰는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있어 보이고 다들 그렇게 하니까 따라 할 뿐이었다. 나는 없었다. 생각 없는 개 한 마리가 쓸쓸하게 짖어댈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를 알고 나로서 살고 싶다. 내 인생의 이유를 스스로 지니고 싶다. 한 마리 개가 아니라 드디어 한 인간이 되려 한다. 인간으로서 위대한 문명을 창조하려고 한다. 도의 높이에서 살고자 한다.
나는 기본학교를 통해 더 확신하고 더 용기를 갖고 더 욕망하고 싶다. 자신의 꿈을 강력히 욕망하는 건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자꾸만 놓고 싶은 마음을 계속 되돌려 꽉 붙잡아야 한다.
기본학교에서 공부함으로써 나는 더 욕망하게 될 것이다. 내가 더 선명해질 것이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힘이 더 세질 것이다. 나는 나의 꿈에 더 확신을 갖고 더 용감하게 덤비게 될 것이다.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 기본학교에서 나를 지켜볼 것이다. 제대로 욕망하기 위해 기본학교에서 기본을 다질 것이다.
교수님을 만나고 어떻게 변했는가?
나는 더 행복하고 더 너그럽고 더 의연하고 더 지적이고 더 용감하고 더 주체적이고 더 자유롭고 더 미래적으로 변했다. 더 건강하고 더 씨알이 큰 사람이 되었다.
교수님께 배우고 싶은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겠는가?
교수님을 직접 만나 기본을 다지고 싶다. 나를 더 정련하고 싶다. 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개인적인 시선에서 나아가 문명적인 눈으로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싶다. 미래로 흐르는 변화를 직시하고 싶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 높이고 싶다.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서 먼저 깨어나고 싶다. 그리고 깨어나려는 이들을 도와주고 싶다. 이 모두가 최진석 교수님과 함께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교수님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나를 높이고 우리나라를 최상위에 올려놓고 싶다. 새로운 대한민국, 새로운 대한 국민을 만드는데 역할을 하고 싶다.
기본학교에서 최진석 교수님과 함께 역사적 현장을 철학적 높이로 사유하고 예술적으로 실천하는 기본이 탄탄한 인간으로 재탄생하고 싶다. 나는 기본학교에서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나처럼 심약하고 정신이 둔하고 시대의 변화와 문제에 무지한 사람이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교수님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서라도 기필코 기본학교에서 공부할 것이다. 이것이 나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기회이자 선물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나의 화두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제 이렇게 정의한다.
“느리고 지속적으로, 때론 내 삶 전체를 바쳐서 생각하고 욕망하는 일”
나는 기본학교에서 교수님의 체온을 느끼는 것으로 새로운 삶의 기공식을 갖겠다. 이제부터 쌓아 올릴 내 고유한 삶의 시작이다.
나는 변하고 싶다. 내 평생의 화두를 교수님을 만나고 조금 풀리는 맛을 봤다. 이제는 멈출 수가 없다. 선진과 선도와 탁월과 창조의 맛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내 안의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낀다.
나의 변화는 반드시 시대의 문제와 함께 할 것이다. 내가 변할 수 있으면 대한민국도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한민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맛을 다 같이 보기를 기대하며, 우선 나 자신이 기본학교를 통해 전에 없던 사람이 되는 상상을 숨 가쁘게 펼쳐본다.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것처럼, 최진석 교수님의 기본학교를 단련하고 깨달은 학생들이 대한민국을 미래로 이끌기를 강력히 소망한다.
2차 에세이는 네 개의 키워드 중에서 하나를 골라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안정과 불안정’을 골랐다.
불안정을 자초할 수 있는가? 나를 휘휘 저어놓을 수 있는가? 익숙한 나를 부정하는 불안정한 에너지 속에서 진짜 내 모습을 볼 수 있는가?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 가수 중에 이예진이라는 가수가 있다. 고 3 때 유튜브에 올린 아델 커버곡이 이슈가 돼서 미국의 간판 토크쇼인 엘렌쇼에 나가게 된다. 한국인으로는 싸이 이후로 두 번째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거쳐 가수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가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를 실험하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파리로 가서 종합예술을 전공한다. 그리고 2년 동안 노래를 잊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었다. 유명해진 자신의 철저한 부정이었다. 완전히 낯선 환경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스스로를 지켜보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가정 분위기는 한국의 전통적인 그것과 많이 달라 보인다. 이념을 설정해놓고 쫓아가는 대신 진짜 자기 모습을 찾는 것을 중심에 놓는다. 그녀는 엘렌쇼에 출연했을 때 한국인들의 반응을 기억했다.
부정적인 댓글들은 그녀를 한국의 대표로 설정해놓고 그녀를 평가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이념의 허수아비로 전락해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한국인들은 자기로 존재하는 것에 약하다. 안정을 추구하느라 자기로 존재하는 불안함을 감당하지 못한다. 판단 기준이 자기가 아니라 외부에서 좋다고 하는 무엇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남들이 박수쳐주는 자신의 노래 실력을 과감히 내려놓고 진짜 자신을 만나러 파리로 떠났다.
그렇게 2년 후 자기 안에 있는 확실한 가수의 욕망을 확인하고 돌아와 가수가 되었다. 그녀가 가수가 된 건 남들이 좋아해 줘서가 아니다. 바로 그녀 자신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긴 인생을 살고 있다.
꿈을 꿀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시선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성공할 수 있을까? 실패하면 어쩌지? 이런 생각으로 과연 꿈을 꿀 수 있을까?
꿈은 성공해야 하는 게 아니다. 꿈은 모험하고 탐험하고 상상하고 시도하고 궁금해 해야 하는 것이다. 꿈은 아직 있지 않은 색깔로 그리는 그림이다. 감각으로 느낄 수 없다. 내 욕망의 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게 꿈의 성격이다.
"남들이 반대하는 건 하나도 안 무서워. 정말 무서운 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거지."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치매환자로 나오는 배우 박인환이 했던 말이다. 문득 내 모습이 보이는데 뭔가 이상하다. 지금껏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면서 남들이 반대하는 것만 무서워하고 있었다. 반대를 당할 게 두려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찾아보지도 않았다.
내가 더 관대해지고 있는가? 내가 더 여유로워지고 있는가? 내가 더 자유로워지고 있는가? 내가 더 풍요로워지고 있는가? 내가 더 튼튼해지고 있는가? 내가 더 명석해지고 있는가? 내가 더 용감해지고 있는가? 내가 더 자비로워지고 있는가?
내가 이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흐릿할수록 나는 더 쪼잔해지고 폭력적이 되고 자잘해지고 멍해지고 불안해지고 약해지고 이기적이 되고 가난해진다.
올바른 것은 어떤 한 가지, 어떤 한 사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이런 것에 마음을 집중하면 잃게 된다. 에너지가 막히고 정신이 희미해진다. 실망하고 용기를 잃게 된다. 애초에 착각과 오해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길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한 가지 실체가 아니다. 마음을 둬야 할 곳은 느리고 지속적인 관계다.
매일의 날씨는 예측할 수 없지만 계절은 예측할 수 있다. 멀더라도 확실한 미래를 보며 불안정한 상태 속으로 과감히 돌진해야 한다.
불안정함 속으로 들어가야 내가 선명해지고, 내가 선명해져야 내 삶을 살 수 있고, 내 삶을 살아야 시대의 문제를 발견하고 과감하게 덤빌 수 있다. 동물원의 호랑이보다 밀림 속의 호랑이가 훨씬 센 이유다.
벌써 6개월도 더 전에 쓴 지원에세이를 다시 읽어본다. 뭉클하다. 그 당시에는 아마 쓰면서도 그 의미를 잘 몰랐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많이 다르다. 마치 그때의 ‘나’가 지금의 ‘나’에게 쓴 편지 같다. 그리고 지원했던 뜻에 맞게 내가 변하고 있고 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