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홧가루가 날리면

by 홍용석

올해는 평년과 달리 봄이 성급히 찾아왔다. 대지의 기운이 일찍 깨어난 탓인지, 산천의 식물들이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린다. 소나무도 그 흐름에 뒤질세라 서둘러 송홧가루를 날리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송홧가루의 계절이 오면 세상은 온통 비상이다. 자동차가 생활의 필수품이 된 현대 사회에서, 송홧가루는 과거의 귀한 대접은커녕 애물단지이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잠시만 실외에 주차해 두어도 차 위에는 노란 가루가 켜켜이 내려앉는다. 그 광경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진다.

사실 알레르기 질환의 주범은 미세먼지나 참나무, 밤나무, 플라타너스의 꽃가루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송홧가루는 입자가 크고 눈에 잘 띄는 노란색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오해와 원망을 홀로 뒤집어쓰곤 한다. 집 안 창문을 꼭꼭 닫아걸어도 어느 틈으로 스며들었는지 거실 바닥엔 뽀얀 가루가 서글프게 쌓인다. 야외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화창한 날씨임에도 노란 먼지바람에 외출이 망설여지고,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 겨우 벗어던진 마스크를 다시금 챙겨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보면 송홧가루는 예부터 우리 곁에 있던 귀한 식재료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산에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송화를 한 소쿠리 가득 담아 오시곤 했다. 마당 멍석 위에 여러 가지 천으로 이어 붙인 보자기(보료)를 깔고, 그 위에 송화를 가지런히 널어 볕에 말리던 풍경이 선하다. 가루가 터져 나올 즈음이면 어머니는 작대기로 송화를 토닥토닥 두드려 가루를 털어내고, 그것을 다시 고운 체로 쳐서 귀하게 보관하셨다. 덜 익은 송화는 단단하면서도 먹음직스러웠다. 한 입 베어 물면 달짝지근하면서도 떫고, 시큼한 맛이 교차하며 입안 가득 진한 솔향이 퍼졌다. 그 투박한 식감은 배고픈 시절 소나무 껍질(송기)을 벗겨 먹던 기억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풍요로운 것이었다.

우리 집안의 명절이나 제사상에 결코 빠지지 않는 음식이 다식(茶食)이다. 밤, 쌀, 콩, 검은깨 등 다양한 재료를 볶고 갈아 조청에 버무린 뒤 다식판에 꾹 눌러내면 하얀색, 검은색, 노란색의 단아한 꽃이 피어난다. 그중에서도 송홧가루 다식은 유독 특별했다. 다른 재료는 조청으로 반죽했지만, 송홧가루만은 반드시 향긋한 꿀을 사용해 정성을 들였다.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기 전에는 음식을 미리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집안의 엄격한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식을 만드시다가 부서진 조각이 나오면, 실수인 척 슬그머니 내 입에 쏙 넣어주셨다. 달콤하고 부드럽게 혀끝에서 녹아내리며 번지던 그윽한 송화의 풍미. 그것은 단순한 별미가 아니었다. 늦은 밤까지 다식판 주변을 맴돌며 졸린 눈을 비비던 어린 아들의 간절한 속내를 읽어낸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그 맛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내 입안에 감돌며 그리움을 자극한다.

소나무는 수꽃인 송화와 장차 솔방울이 될 암꽃이 한 나무에 공존하는 자웅동주(雌雄同株) 식물이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오묘하다. 암꽃은 수꽃보다 항상 높은 가지 끝에 자리를 잡는다. 이는 자신의 꽃가루가 바로 아래에 있는 암꽃에 떨어지는 자가수분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근친번식으로 인한 유전적 퇴화를 막고 종의 강인함을 유지하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더욱 경이로운 사실은 소나무가 바람이 분다고 해서 아무 때나 가루를 날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년간 숲을 관찰하며 깨달은 사실인데, 소나무들은 마치 정교한 통신망으로 연결된 듯 적정한 기온과 습도가 갖춰진 찰나를 기다린다. 그리고 때가 되면 군락 전체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노란 분진을 뿜어낸다. 뿌리로 교신을 하는 것인지, 잎으로 신호를 주고받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종족 보존이라는 숭고한 ‘번식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점이다. 비록 인간에게는 노란 먼지로 보일지언정, 소나무에게 그것은 생명을 향한 절박한 외침이자 가장 화려한 구애인 셈이다.

우리 민족의 소나무 사랑은 유별나다. 이름부터 '으뜸'을 뜻하는 '솔'이라 불렀으며, 나라의 기둥이 될 재목으로 삼아 궁궐을 지을 때도 소나무만을 고집했다. 소나무는 눈보라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는 기개와 지조의 상징이었다. 그런 소나무가 단지 자동차를 더럽히고 생활에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냉대받는 현실이 못내 억울하고 안타깝다.

번식의 의무를 소홀히 여기고 생명의 연속성보다 개인의 편의를 우선시하는 요즘의 시대를 바라보며, 허공에 노란 가루를 뿌리는 소나무들은 과연 무어라 할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지만, 종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던지는 소나무의 저 치열한 생존 본능과 공동체적 약속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올봄, 내 차 위를 덮은 저 노란 송홧가루를 보며 짜증 대신 소나무가 건네는 생명의 인사로 받아들여 보려 한다.

2024. 10, 11 한국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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