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영어 5
김민식 피디는 ‘영어책 한권 외워봤니’라는 책에서 “가만히 앉아 미드를 보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일이고, 힘들게 소리내어 영어회화를 암송하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필요한 일을 먼저 하고, 원하는 일은 나중에 하세요. 그게 시간을 배분하는 바람직한 기준입니다”(p239)라고 말한다. 뜨끔했다. 어디에선가 나를 보고 있나. 방금도 미드보고 낄낄대며 좋아했는데. 미드 보는 것에 대한 기쁨의 글도 썼는데.
수업 첫시간이면 항상 아이들에게 하는 잔소리와 훈계, 조언과 충고 그 중간쯤의 이야기가 있다. 나의 이름, 과목의 성격, 수행평가 실시계획 등을 이야기한 후 칠판에 계단을 그리고 훈계를 시작한다. 여러분에게 꼭 해주고픈 이야기가 있노라고. 영어를 공부하는 과정은 계단과 같다고. 공부를 해도해도 늘지 않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고. 나는 뭘하는 건가, 방법이 틀린건가, 스스로를 의심하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 시간을 버텨내다 보면 어느 순간 훅 올라간 자신을 발견하게될거라고. 평지를 걸어가는 것 같지만 이건 계단이라고. 열심히 하다보면 훌쩍 한계단 올라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거라고. 보통 한계단을 올라가는데 3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들 하지만 그건 개인차가 있는거라고. 자신을 믿고 계단 올라갈 때의 희열을 한번 느껴보라고.
어디서 들은 개똥철학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굉장히 공감되는 이야기여서 항상 일년의 수업 시작전에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곤 한다. 3월 아직 긴장감과 기대감에 차있는 첫수업의 학생들은 그 똘망똘망한 눈으로 끄덕여준다. 귀엽게.
계단식으로 성장하는 건 사실 영어공부 뿐만은 아닐 것이다. 예전 무릎팍 도사에 안철수가 나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제일 어렵고 힘든 길이 맞는 길일 때가 많다고. 요령을 찾는 것 보다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이 답일 때가 많다고.
영어공부를 좋아했고, 한계단 오를 때의 기쁨을 느껴도 보았지만, 고백하자면 한동안의 나는 영어정체기였다. 여전히 영어를 좋아하지만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 상태. 그냥 여기서 더 나아지진 않을 것 같다고 스스로를 포기한 상태. 더 공부하면 뭐하나 하는 허무에 빠진 상태. 현재의 삶에 지쳐 허덕여 영어 따위 사치로 느껴지는 상태. 직장을 갖고 아이를 낳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 나에게 현실이 준 과제를 하나씩 수행해 나가면서 영어라는 나의 로망은 점점 뒷자리가 되어갔다. 마지막 보루 미드를 보며 이것도 공부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내 속의 나는 조그맣게 포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계단은 여기가 끝인가봐. 이제 올라갈 곳 없는 평지인가봐.
더워도 너무 더워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뻘뻘나는 2021년의 여름, 남편은 프로젝트로 바쁘고 코로나는 4단계로 격상되어 오갈데 없이 집에서 두 망아지들과 삼시세끼를 먹어가며 버티던 여름방학에 조용히 컴퓨터를 켜고 오바마의 연설문을 찾아 프린트했다.
정치적으로는 무지하지만 미드 뉴스룸에서 자료화면 격으로 나왔던 오바마의 연설을 보고 그의 연설문을 공부하고 싶었다. 빈라덴 사살 후의 연설이었는데, 9/11 테러 이후 저녁식사 시간의 빈자리, 아버지나 어머니 없이 자라야 했던 아이들, 다시는 아이를 안을 수 없는 부모들, 그 마음속 구멍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났다. 연설문은 딱딱하고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담담한 발표도 마음을 울릴 수 있구나 싶었다. 더군다나 격식이 있는 언어라 공부하면 뭔가 더 있어보일것 같았다.
프린트한 오바마 연설문을 냉장고 문에 붙였다. 빈라덴 사살 후 연설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나름 유명한 연설문 인 듯 하여 게을러져 또 잊고 살아가기전 서둘러 출력하고 냉장고 문에 붙였다. 그날 저녁 설거지를 하며 중얼중얼 연설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속도가 빨라서 반페이지 정도 외울 수 있었다. 외울 땐 꽤 많이 외웠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외운 내용을 침대에 누워 속으로 읊어보니 한순간 이었다. 외우며 설거지를 하니 설거지 하는 시간이 배 이상으로 걸렸다. 재미있었다. 뇌가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직 살아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오바마 연설문 외워 뭐하냐 하는 마음도 조금은 들었다. 그래도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매일 헉헉대며 아침식사를 차리고 멍때리고 핸드폰 보다가 점심차리고 첫째 학원 바래다 주고 공부시키고 저녁차리고 씻기고 재우는 일상에 연설문을 외우는 10분이 추가된 것 뿐인데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엉덩이 토닥토닥 해주고 싶었다.
연설문을 외우며, perseverance라는 단어도 외웠고, 오바마 가족사도 알게되었다. My presence on this stage is pretty unlikerly라는 고급진 표현도 익혔다. 그런데 이런 것 보다 그냥 자다가도 내가 외운내용을 다시 생각해보고 짬이 날때마다 뭐였지 하고 생각해보며 다외우면 혼자 뿌듯한 이 느낌이 너무 좋았다.
2쪽을 다 외우고 3쪽을 시작할 무렵 아이들이 개학을 했다. 개학을 하니 더 바빠졌다. 눈비비고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 깨우고 학교와 유치원 보내고 운동하고 돌아와 씻고 점심먹고 아이들 데려와 밖에서 노는 거 좀 지켜보다 학원보내고 하느라 헉헉댄다. 연설문은 아직 3쪽에 머물러 있다. 하루에 반쪽씩 외웠으니 그야말로 작심삼일이다. 작심 사일 정도 되었으니 하루 이득본 것일라나.
그래도 냉장고에 붙여둔 오바마 연설문을 떼고 싶지 않다. 제일 잘보이는 자리에 떡하니 붙여두었다. 아이들의 식단표와 주간학습 안내, 유치원 소식지 등을 밑으로 내리고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이 평지 끝에 계단을 오를 수 있을지 아직 모르지만 계속 걷고 싶다. 게속 공부할 건덕지가 있어서 영어를 공부한 것이 영어를 좋아한 것이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