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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여우 Nov 08. 2023

끝나지 않은 여정(旅程), 햄릿 읽기

 몇 해 전 서점에서 ‘햄릿’을 한 권 샀었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던 시기였고, 주변에서 고전을 다시 읽어보라는 권유도 있었다. 많은 고전 중에서 왜 셰익스피어를 읽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이번에야말로 꼭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제대로 읽어보겠다고 다짐했었다. 햄릿을 택한 것은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는 내용이 너무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 들어서였다. 그나마 햄릿이 다른 작품들보다 많이 들어봐서, 조금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읽기가 어려웠다. 정확히는 희곡 읽기가 어려웠다. 국어 교과서에 희곡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때도 희곡 읽기는 재미없었다. 시나 소설처럼 쉽게 읽히지 않았다. 대사로만 쓰였기에 왠지 모를 딱딱함을 느꼈고, 대사가 길 때는 호흡을 조절하기 어려웠다. 묘사가 적어서 장면을 상상하고 재미를 느끼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국어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 실린 희곡의 배역을 나누어 읽게 했었는데, 소설 읽듯이 대사를 읽었을 때의 어색함과 부끄러웠던 기억도 한몫한 것 같다. 연기자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서투를 수밖에 없었는데도 희곡 자체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되었다.


 셰익스피어 비극을 읽은 적은 있다. 쇠사슬을 온몸에 칭칭 감은 아버지 유령이 그려진 삽화, 바람 부는 벌판을 걸어가는 눈먼 리어왕의 삽화를 떠올릴 만큼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소설처럼 편집한 동화책이었다. 줄거리는 기억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희곡을 읽은 것은 아니었다. 너무 어린 시절 읽었던 줄거리만으로는 햄릿 속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어느 장면에서 나오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왜 그토록 작품을 대표하며 유명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시 읽기 시작한 햄릿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일이 바빠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도 있겠지만, 몇 장을 읽다 보면 눈이 스르르 감겼다. 성인이 되어서도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대사는 익숙하지 않았고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읽다가 잠들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책을 펼 생각도 하지 않게 됐다. 4대 비극 읽기는 시작도 제대로 못 하고 이렇게 멀어지는 듯했다.


 우연히 신문에서 연극 햄릿 공연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셰익스피어 타계 400주년과 이해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극장에서 하는 공연이었다. 이해랑에 의해 1951년 국내에서 최초로 전막 공연이 이루어졌고, 마지막 연출을 준비하던 작품도 햄릿이었다는 설명도 함께 있었다. 연극계에서 유명한 배우들도 출연한다고 했다. 신문을 읽고 나서 내가 직접 읽지 못한다면 배우를 통해 희곡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번득 들었다. 게다가 유명한 배우들이 읽어준다니 이 연극을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대사를 무대에서 꼭 듣고 싶은 것도 목적의 하나였다. 햄릿 읽기라는 늪에서 탈출하게 해줄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연극으로 읽은 햄릿은 만족스러웠다. 읽기 어렵다고만 느꼈던 대사들은 무대에서 배우들을 통해 살아났다. 책을 다 읽은 것 같은 기분에 흡족했고, 세밀한 내용까지 알게 되고 작품을 이해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배우들 연기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했지만, 햄릿을 연기한 배우의 염색하지 않은 흰 머리카락이 마음에 거슬렸다. 너무 중후하고 노련한 햄릿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얼마 후 젊은 배우가 연기한 다른 햄릿 연극을 찾아 관람해 보았다. 젊은 햄릿은 더 역동적이면서도 연민을 느끼게 해주었다. 진짜 햄릿을 만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아쉬움이 있었다. 왕자 햄릿에 중점을 두다 보니 여러 내용과 출연자들이 생략되었다. 햄릿은 만족스러웠지만 오필리아나 거트루드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은 어딘가 허전했다. 또 다른 햄릿 공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략된 부분들과 다른 배우들이 연기한 인물들을 보고 싶었다.


 이 후 다양한 작품으로 햄릿을 만났다. 희곡에 아주 충실한 연극과 영화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이 더 많았다. 판소리로 만들어진 햄릿, 뮤지컬로 만들어진 햄릿, 4개의 자아로 분리된 햄릿, 여자 햄릿 등 변화된 작품이 많았다. 햄릿 왕자가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지만, 오필리아나 왕비 거트루드 또는 아버지를 죽인 삼촌 클로디어스가 이야기를 이끌고 가기도 했다.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 어떤 성격을 부여하느냐, 현 사회 현상에 어떻게 접목하는가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달라지기도 했다. 우유부단한 햄릿, 아버지의 죽음보다 자신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분노하는 권력형 인간으로서의 햄릿, 순수함으로 위장하고 햄릿을 이용해 오직 부귀영화만을 노리는 오필리아, 죽지 않고 자아를 찾아 떠나는 오필리아, 하루도 남자 없이 살 수 없었던 거트루드의 욕망, 햄릿 왕의 무관심과 가정 폭력을 피해 첫사랑 클로디어스에게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거트루드,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는 덴마크를 지키기 위해 전쟁광 햄릿 왕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클로디어스, 궁중의 모든 여자가 반할 만큼 섹시한 클로디어스 등. 왕자 햄릿뿐 아니라 작품 속 인물들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 낸 틀 속에서도 햄릿은 다양하게 변주되었고, 변주될수록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새롭게 태어난 인간상들은 주변의 인물이기도 했고, 때론 과거나 현재의 자신이기도 했다. 그 인물들을 보면서 반성도 하고 희망을 품어 보기도 한다.


 책 읽기를 대신해 연극을 한번 보는 것으로 끝나게 될 줄 알았던 햄릿은 계속해서 찾아보게 되는 작품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인간상과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 탄생하는 햄릿 읽기가 늘 기대된다. 그를 따라 함께하는 이 여정을 끝낼 수가 있을까? 연극으로 햄릿을 많이 읽다 보니 희곡을 읽는 두려움은 어느덧 사라졌다. 하지만 또 다른 고민도 생겼다.


‘누구냐, 서라!’

햄릿 1막 1장 보초병 버나도의 첫 대사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놀란 마음으로? 비장한 심정으로? 아니면 졸다가 깨서 귀찮은 목소리로 읽어야 할까? 버나도는 어떤 성격의 사람일까? 겁쟁이인가? 출세를 지향하는 야심가인가? 아니면 햄릿 왕자처럼 아버지의 복수를 몰래 준비하고 있는 사람인가? 나라면 버나도에게 어떤 성격을 부여할까? 즐거운 상상이다. 즐거운 고민이다.


이렇게 할 것인가, 저렇게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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