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by 연두님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공진호 옮김. 문학동네. 2018.

연두 서평.


소설 얘기가 나올때면 난 길면 길수록 더 재미있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결과적으로 그랬으니까. 생각해보면 긴 소설은 내가 충분히 그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경사 바틀비>는 읽고 또 읽어봐도 바틀비가 왜 저런 말을 하고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글이 짧으니 정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런 미니멀리즘 같으니라고! 단편소설은 어려워!


그래서 나는 집단지성의 도움을 받으려고 나의 두 딸들에게 이 책의 줄거리를 이야기했다. 나의 사랑스런 딸들의 커다란 눈동자는 점점 더 깊어지더니 미세하기 흔들렸다. 바틀비가 외로웠을거 같다고 말했다. 어 어? 뭐지? 나와 다른 반응인데? 뭘 놓친거야?


처음엔 이 책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을'인 자들이 저항과 거부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읽은 후에는 인간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질문을 담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두가지 중 어떤 것으로도 바틀비의 말과 행동을 일관되게 해석할 수 없었다. 딸들과 대화 후, 바틀비를 눈으로 읽지 말고 느껴야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읽은 <필경사 바틀비> 이야기는 이렇다.


뉴욕 월스트리트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변호사인 화자는 서류를 필사하는 도움이 필요해 필경사 바틀비를 채용했다.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모습인 그는 놀라울 정도로 필사를 하고 어떤 유흥도 즐기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한다. 그런 그에게 변호사는 자신도 모르게 남다른 신뢰를 갖는다. 그러나 바틀비에게 그가 하는 필사 외에 서류를 검증하자고 하거나 심부름을 시키거나 잠깐 도와달라고 요구하면 그는 항상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라고 정중하게 말하곤 한다. 그럴 때 그의 태도는 “변호사가 하는 모든 말을 신중히 숙고하는 듯했다.” 실제로 영어 표현인 ‘ I would prefer not to’ 는 상대 입장과 내 입장 양쪽 모두를 생각해본 후 ‘아무래도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당신에게도 내게도 더 좋겠습니다.’ 라고 예의바르게 하는 말이라고 한다. 거부하는 말이 아니라 생각해보니 둘 다를 위해 안하는게 더 끌린다는 예의바르고 섬세한 표현이다. 바틀비는 거의 모든 말을 이 문장으로 하다시피 하는데 이것으로 유추해 보면, 그는 항상 조심스럽고 상대를 배려하고 신중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자존심을 중시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변호사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고집을 부린다고 여겨져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자신의 사무실에 들렸을 때 바틀비가 그곳에 거주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날 발견된 그의 책상 서랍의 낡은 손수건에 싸인 저금통과 사무실 거주, 생강과자 외엔 술도 커피도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 또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그리고 주검같이 생기없는 것과 모든것을 엄격히 자제하는듯한 면모, 바틀비가 보여 준 이 모든 것이 가르키는 것은 가난이었다.


변호사는 그의 가난에 대하여 도움을 주려 대화를 시도하지만 기대한 대로 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나는 ~하지 않는것을 택하겠습니다.’일 뿐. 체면과 선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변호사는 매번 자신의 선의가 인정받지 못해 마음이 좋지 않다. 사무실에 거주하는게 발각되고 도움을 주려는 변호사의 말이 있은 다음날부터 바틀비는 일도 안하고 창 앞에 멍하니 서 있기만 한다. 어째서 필사를 하지 않냐고 물어보자 “그 이유를 스스로 보지 못하세요?” 라며.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순수한 의문일까 비아냥일까? 아무튼 그는 그렇게 사무실을 떠나지도 않고 일도 하지 않으며 거기에 있다.


동화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며 무례함을 가지고 있다, 가난은 이런 해석을 입힌다.


변호사는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 그러나 바틀비는 예전 사무실에 또 다른 변호사가 입주한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일하지 않고 있다가 쫓겨난다. 하지만 낮엔 그 건물 계단 난간에 앉아 있고 밤엔 건물 입구에서 잠을 자며 지낸다. 그 건물 입주자들과 건물주의 항의와 부탁에 그 전 변호사인 화자가 바틀비를 만나 다른 일을 권해보기도 하고 자기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도 제안하지만 바틀비는 그 어떤 것도 택하지 않겠다고 하고 자신은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I am not particular.)


영어 원문을 보면, 바틀비는 얽매이는 일도 싫고 확정적이지 않은 일도 싫은데, 그렇다고 자신이 까다로와 그런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좀 더 그의 마음깊이 내려가보면, 제가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이지만 저도 사람이라 자아가 있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아무거나 먹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 제 처지에 그런걸 가릴때냐고 나무라실지는 모르겠으나 저도 당신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라 아무 일이나 무조건 하고 아무거나 무조건 먹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선택과 거부는 제가 까다로운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저의 존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쫓겨난 자들은 늘 그래왔듯이 가난한 그들이다.


결국 바틀비는 부랑자로 취급되어 구치소에 갇힌다. 변호사가 그에게 찾아가 보니 그는 일체 먹지도 않고 높은 벽에 둘러싸인 잔디 덮인 안 마당에서 벽을 바라보며 그에게 “나는 당신을 알아요. 당신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라며 외면한다. 그리고 며칠후 다시 면회를 갔을 때 바틀비는 잔디 마당 높은 벽 밑에 웅크힌채 두 무릎을 끌어 안고 모로 누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자세로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


따돌림, 소외, 우울, 포기, 은둔자.

그들이 제거되길 원하는가?


바틀비는 필경사로 취직하기 전에 수신자가 없어 배달 되지 못하고 반송될 수도 없는 죽은 편지들을 취급하는 일을 하다가 해고되었다. 그는 가난해도 인간의 품위를 갖추고자 애썼지만 세상 어느 곳에도 자신이 쉴 만한 작은 집조차 만들지 못해 이리 저리 유령처럼 떠돌았다. 그런 그의 삶은 아무에게도 도착하지 못하고 불태워지는 죽은 편지들과 너무 닮아있다.


모든 것을 빼앗긴 그들에게 남겨진 권리는, 있을까?


창백한 직원은 이따금 접힌 종이들 사이에서 반지를 가려내기도 한다. 그 반지가 끼워져야 했을 손가락은 어쩌면 무덤 속에서 썩고 있을지 모른다. 누군가가 즉각적인 자선을 베풀어 발송한 지폐가 나오기도 한다. 그것으로 구제를 받았을 사람은 더이상 먹지도 배고파하지도 않는다. 절망하며 죽은 자들에게 용서를,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죽은 자들에게 희망을, 구제 없는 재난에 질식해 죽은 자들에게 희소식을 전하는 편지가 나오기도 한다. 생명의 심부름을 하는 그 편지들은 급히 죽음으로 치닫는다.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p93


<필경사 바틀비>는 허먼 멜빌이 1853년에 쓴 글이다. 그는 2년전인 1851년 심혈을 다해 쓴 소설 <모비딕>을 세상에 내 놓았는데 수익이 거의 나지 않았다. 이 책은 그렇게 어렵고 비참한 생활을 하던 시기에 쓴 단편이다. 그래서 바틀비는 허먼 멜빌의 자화상 같기도 하다. 그리고 170년이 지난 2025년 나와 접촉하고 있는 누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필경사 바틀비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큰 딸이 던진 질문은 “바틀비 사인이 뭐였을거 같아?” 였다. 그러자 1초의 지체도 없이 작은 딸이 “고독사” 라고 대답했다.


나는 깊이 반성했다. 내가 처음에 이 책을 읽으며 바틀비를 나처럼 느끼지 않고 그의 말과 행동을 분석하려 했던 것, 이것이 어쩌면 내가 타인을 대하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을 때 내가 친구에게 베풀었던 선의들이 위선으로 보여질 수도 있었겠다 생각하니 몹시 창피했다. 바틀비도 변호사의 호의를 위선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진정으로 바틀비가 원한것은 무엇이었을까? 호의와 선의는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는 또 다시 부끄러웠다. 가난으로 외로운 나의 친구들이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던 품위라는 인격의 옷을 내가 감히 호의와 선의라는 핑계로 발가벗긴 것은 아니었을까? 바틀비같은 그들에게는 숨을 집이 필요했겠다는데에 생각이 미치자 또 창피해졌다.


가난은 고립을 만든다. 자유의지마저 빼앗는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한 모든 선의는 위선이다. 때론 도와주겠다는 말보다 침묵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도와주고 싶다면 '올리브영'처럼 해야 한다는 딸의 농담이 자꾸 생각난다. '나한테 이런 이런게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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