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는 아이를 국제학교에 어떻게 적응시킬까?
8월 14일 대망의 첫 등교를 하게 되다!!
거리도 상당해서 아침 7시쯤 호텔을 나섰다. 학교 교복이 곤색 카라티에 베이지 바지(교복으로 잘 선택하지 않는 색깔)인데 아이랑 잘 어울려서 기분이 좋았다. 교복에 학교에서 지정해 준 흰 양말에 검은색 운동화까지! 내가 낳았지만 멋지다!!! 아들!!!
한국에서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고, 태권도 검정띠 국기원 심사를 5-6개월 남겨두고 오기 싫고, 우리 집이 좋고... 다양한 이유로 싱가포르행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싱가포르에 와서 다양한 곳을 여행시키며 조금씩 싱가포르에 적응시키고 좋은 면을 볼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 학교 가기 전 음식점, 상점 등에서 아이가 직접 소통해서 계산하도록 했다. 자꾸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스며들도록 했다. 그랬더니 아이에게 조금씩 용기가 생기나 보다!
아직 여기 생활이 적응도 안되었고 심지어 집도 구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보내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담임선생님께서 영국에서 오신 남자 선생님이신데 말 그대로 영국 신사 같은 분이셨다. 물론 외모에서 풍기는 신사다운 모습도 있지만 이제 언급할 아이의 문제에 따뜻한 지지와 신뢰를 보여주셔서 더 그렇게 느꼈다. 아이에게는 건강에 관하여 꼭 학교와 상담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가 가지고 있는 계란 알레르기문제이다. 이 계란 알레르기 문제가 아이의 성공적인 입학에 발목을 잡게 되었다.
아이의 계란 알레르기
어릴 때부터 있었는데 계란알레르기는 커가면서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하지만 서울 빅 4 병원의 소아 알레르기 담당교수님들은 우리 아이의 수치가 워낙 높아 초등학교가도 좋아지기 힘들다고 했다. 사실 원망스럽기는 했지만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었다.
대신 병원에서 말한 대로 철저하게 계란을 차단하는 식단을 유지했고 아이가 기관생활을 시작하며 어린이집, 유치원 결정을 할 때는 계란 알레르기 케어 여부가 가장 중요한 결정요소가 되었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아이가 만난 교육기관에서는 최선을 다해주셨고 나도 집에서 할 수 있는 케어에 최선을 다했다. 생일파티에는 항상 떡케이크를 주문해서 보냈고 친구들이 빵이나 케이크를 먹을 때는 계란이 안 들어간 빵을 공수해서 따로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아이가 5-7세 사이 다니게 된 직장어린이집의 영양사님은 아이를 위해서 다양한 대체식을 준비해 주셔서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성장해 가면서 꾸준히 아이의 계란식단을 차단하고 1년에 두 번씩 꼭 대학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로 수치를 확인하고 상담을 했었다. 그러다가 학교에 갈 즈음 아이의 계란 알레르기 수치는 조금씩 좋아졌다.
초등 2학년 때 구운 계란으로 면역치료를 시작했고 일반계란보다 반응이 약한 구운 계란 적응에 성공하여 계란이 들어간 빵이나 구운 계란을 조금씩 먹을 수 있었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고 이제 삶은 계란에만 적응하면 아이의 계란 알레르기로 인한 쇼크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가 싱가포르행을 결정하고 기존에 다니던 병원에서 삶은 계란으로 유발검사를 실시했다. 그날은 아이의 방학식이자 나의 방학식이기도 했다. 싱가포르행으로 인해 내가 담임했던 아이들과도 이별을 해야 하는 날인 것이다.
유발검사 날짜 예약이 어려워 가까스로 방학식 날로 잡았는데 아이의 계란 유발검사 도중 쇼크가 왔다!!!
나는 아이가 1시간 반에 걸쳐 계란을 다 먹은 것을 보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는데 내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 아이에게 쇼크가 왔다. 아이 아빠가 함께 있었는데 전화연락이 안 되어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겨우 연락이 된 남편은 아이에게 쇼크가 심하게 왔다고만 했는데 전화기 너머 교수님이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몸이 덜덜 떨렸다....
다행히 병원까지 가까워서 나는 다른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고 반 아이들을 맡기고 나갈 수 있었다. 내가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안 아이들은 내가 급하게 나가서 미안하다고 하니 내 주위를 갑자기 둘러싸고 부둥켜 다 같이 울기시작했다. 그때 나는 너무 괴로웠다.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우리 아들에게도 미안하고....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중환자실에 있다고 연락을 받고 원무과에 가서 수속을 하고 오라고 안내를 받았다. 엄마라서 초인적인 힘이 나왔다.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아이 일을 잘 처리하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노력했고 할 일을 다 마치고 아이에게 올라갈 수 있었다. 아이가 쇼크상태였지만 지금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병실 안이 정리되고 아이를 보러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는 전신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부르면 대답은 했지만 눈은 잘 못 뜨는 상태였다.
의식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중환자실로 오신 담당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마음은 무너져 내리고 병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며 울부짖고 싶었지만 나는 담당교수에게 이곳에서 아이를 제대로 케어할 수 있겠냐며 전원도 고려하고 있다고 먼저 말했다. 솔직하게 답변해 달라고.. 자신 없으면 바로 옮기겠다고...
교수님은 최선을 다해보겠다며 지금도 아이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하고 교수님과 함께 아이를 보러 다시 갔다. 아이가 주변 간호사들에게 다리가 가렵다고 긁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휴.... 이제 아이가 의식이 제대로 돌아오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교수님이 아이를 부르니 아이가 눈감은 채로 대답만 했는데 내가 아이를 부르고 얼굴을 만지니 눈을 번쩍 떴다!!!
"OO아!!! 엄마 왔어! 잘하고 있어! 너무 말하려고 애쓰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OO이!! 너무 잘하고 있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아이가 그때부터 눈도 뜨려고 하고 안정을 점점 찾아갔다! 교수님도 다시 아이를 보러 오시고는 아이 상태가 좋아짐을 확인하고 몸에 연결되어 있는 의료 장치들을 하나씩 없애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아이는 저녁쯤 죽을 한 그릇 뚝딱하고는 농담도 하고 정상적인 대화를 했다. 교수님은 오늘만 중환자실에서 자고 다음 날 일반병동으로 옮겨 하루 더 지낸 후 집으로 가면 될 것 같다 하셨다.
나는 계속 되뇌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가 건강하게 돌아온 것만으로 감사했지만 아이의 계란 알레르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계란 삶는 냄새만 맡아도 배가 아프다고 했다. 그동안 열심히 빵과 구운 계란으로 아이의 면역수치를 높여왔는데.다시 원위치가 된 것 같았다. 일시적인 것인지 정말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때 싱가포르행을 진심으로 다시 고민했던 것 같다. 싱가포르 출국일이 불과 2주 남짓 남은 시점이었다.
그 이후 다시 교수님을 만났고 교수님은 싱가포르의 NUH(싱가포르국립대학교병원) 소아 알레르기 담당교수를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나의 고민을 들어보시더니 싱가포르가 음식알레르기에 있어서 한국보다 더 철저한 나라라고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다. 사실 나도 주변으로부터 비슷한 의견을 많이 들었다. 다양한 문화, 종교가 모인 싱가포르는 이슬람의 할랄뿐 아니라 유대인의 코셔 식단까지 신경 쓰는 곳이라고! 그리고 인도인도 많아서 채식주의자도 많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의견이었다!!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괜찮아. 가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아들을 믿었고 아들 말대로 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병원에서 영문 소견서 및 각종 알레르기 응급약을 꼼꼼하게 챙겼으며 싱가포르에서 사용할 아이 알레르기 관련 용품을 준비했다.
이런 이유로 걱정과 긴장이 더해진 싱가포르행이었지만 아이는 감사하게도 6개월 동안 학교의 알레르기 식단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고 퇴원 후 일시적으로 보이던 흡입알레르기도 학교생활동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계란 알레르기는 등교 이틀 후 나에게 첫 시련을 준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우리 가족에게 준 첫 시련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