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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오 Jan 22. 2024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을 꿈꾸며...

상처가 별이 될 수 있을까 - 홍승의

 청주교구 소속으로 과테말라 ‘천사의 집’에서 어린 시절부터 상처받은 현지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생활하고 있는 홍승의 가브리엘 신부님께서 ‘천사의 집’에서 함께 아이들을 돌보며 선교생활을 하고 있는 청년 선교사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책이다.


 상처로 얼룩진 현지 아이들의 마음이 따뜻한 별이 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라면서도, 현실적인 어려움과 난관들 속에서 선교 생활을 하며 지쳐가고 있는 젊은 선교사들이 그 길을 충실하게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당부와 응원도 담고 있는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상처와 별이란 단어 사이에도 걸어야만 하는 험난한 광야가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자리에서 이 두 단어를 연결시키는 일은 마치 길 없는 광야를 헤매는 일과 같았습니다. ‘상처가 별이 될 수 있을까?’라는 문장은 저희에겐 간절한 꿈이면서도 여전히 난감한 화두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대기근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자손인 요셉이 자리잡고 있는 이집트로 건너가 생활한 이후 수 대에 걸쳐 이집트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시간이 수대에 걸쳐 흐르면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집트 지배집단들로부터 착취를 당하고 힘겨운 노역을 하는 등 고통을 당하고 있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가나안 땅으로 옮겨가는 힘겨운 여정에 나서게 된다.


 고통과 고난의 땅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희망과 꿈의 땅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바로 구약성경의 탈출기인데, 신부님께서는 희망과 꿈을 찾아 나서는 탈출기의 여정을 편지에 녹여내면서 선교사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것들. 탈출기 속에 숨겨진 의미 등을 설명해 주고 있다.


 “신앙의 깊이란 삶의 깊이일 수밖에 없고 삶의 깊이란 결국 질문의 깊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보듬어 안아준다는 것. 수많은 상처와 아픔들로 꼭꼭 닫혀 있는 마음을 조금씩 열어간다는 것. 상처로 가득 찬 그 마음에 한줄기 따사로운 햇빛과 같은 존재가 되어 준다는 것 등은 사실 아무리 각오를 하고 있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아울러, 상처투성이의 마음에 함께 희망을 심고, 그 희망을 일궈 나가는 일은 먼저 상대방의 상처를 살피고, 그 상처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최근 고해성사에서 ‘용서’라는 화두로 고해를 했는데, 당시 신부님께서는 나의 ‘상처’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지난해 깊이 공감하며 읽었던 허찬욱 신부님『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너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말이 상대방에게는 공감의 말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려면, 타인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 ‘조심스레’ 물어야 합니다. 타인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은 어떤지 ‘섬세하게’ 봐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나의 상처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의 상처를 감히 ‘이해’한다고 쉽게 할 수 없듯 그 사람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 또한 그 사람의 시각에서, 그 사람의 입장에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


 아울러, 세상이 다 허물어질 것 같고, 희망이라고는 없는 슬픔과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꽃을 피워야 함을,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의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벗어나기 위한 40년의 광야의 여정을 시작했듯이 ‘희망’의 여정을 걸어가야 함을 신부님은 말하고 있다.


 “구원의 무게란 항상 절망의 무게에 비례합니다. (…) 희망은 절망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절망의 부당함을 항변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아무리 완전한 절망의 세상이라도 그 안에는 간곡한 희망을 살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탈출기는 무너진 세상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희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특히, 신부님은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는, 하느님께 종신 서원을 하고 향후 사제로서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청년 선교사들에게 현실에서 맞닥뜨린 어려움과 험난함에 쉬이 지쳐 떨어져 나가지 않기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고 편지를 전해주고 있다.


 그 여정이 바로 청년 선교사들이 인생에서 걸어가야 할 ‘탈출기’임을,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겨내고 구원과 희망의 땅으로 향하는 여정임을, 탈출기의 현실적 해석으로 풀어주면서 자신의 다음 ‘밀알’로서 성장해주기를 진심으로 격려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밀알’세상을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의 씨앗이 되어, 지치지 않고 널리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애정 어린 응원의 마음까지도 담고 있다.


 “상처를 마주하는 일이 힘든 건 사람의 아픔을 품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아픔을 만들어낸 사람이 지닌 탐욕의 민낯을 보게 되기 때문이기도 해.”


 “아무리 모진 시간이라도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 힘으로 살아내게 되는 거 아닐까? 어둔 세상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그런 세상에서도 사랑을 지켜내고 사랑하고 있느냐’의 이야기겠지.”


 “세상에는 사람이라서 사람의 마음을 버릴 수 없는 (…) 사람의 마음을 끝내 지켜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입게 될 불이익의 어두움을 생각하지 않아. 당연한 선택을 경쾌하게 감당하지. 이 당연한 선택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고 세상에 슬픔을 줄일 수 있는 희망이란 걸 잘 알고 있거든.”


 “탐욕의 반대말은 연민이야. 탐욕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읽어내지 못하는 문맹이고, 연민은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읽어내는 마음인거지. (…) 생명을 지키고 돌보는 선택과 사람에 대한 연민만이 탐욕의 세상과 싸울 수 있는 희망일거야.”


 고난과 어려움을 자처한 자신이 택한 길임에도 현실에서 겪은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더군다나 상처 투성이인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엇보다 깊은 공감과 아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사랑에 바탕하고 있어야 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다.


 최근 미사 강론에서 “내가 사랑받기를 바란다면, 바로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내가 사랑받는’ 길이자 바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새삼 느껴본다.


 “한순간 나타났다가 잠적해버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순간에 함께 있을 하느님이란 거지. 그러니 너의 소명과 열정 속에서 불안해 하지 말라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처럼 따뜻한 이름으로 들려. (…) 소명에도 능력이 필요하다면 그건 소명의 의미를 잊지 않고 확인할 수 있는 마음일 거야.”


 “꿈을 꾸는 동료는 경쟁하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꿈꾸면서 같이 꿈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이지. 꿈이 무거울수록 그 꿈이 들고 있을 동료가 소중해지지. 동료가 하나 생기는 건 그만큼 한 발자국이라도 더 걸을 수 있다는 얘기잖아.”


 “하느님의 손길이 수없이 함께 해도 그분과 함께하는 이의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소명은 무너지고 말 거야.”


 “이상하게도 하느님은 항상 마지막 순간에야, 길이 없다 느끼는 순간에 길을 열어주시잖아. 하긴 지금까지도 하느님은 움직이고 계셨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분의 움직임을 느끼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어.”


 아무래도 신부님은 청년 선교사들이 현실에서의 숱한 어려움에 지쳐 ‘소명’의 길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신 듯 하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고고, 상처가 별이 되기를 간절히 함께 꿈꾸며 희망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그것을 함께 해 나가는 사람이 정작 지쳐 쓰러져 떨어져 나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탈출기의 ‘모세의 소명’ 이야기를 통해, 항상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그리고 당위적 의무로서의 소명이 아니라, 함께 할 동료가 있음에, 그 꿈을 함께 지탱해주고 기꺼이 같이 감내해 줄 동료가 있음을 깨우쳐 주시며 ‘소명’의 길을 끝까지 ‘묵묵히’ (자신처럼) 걸어가 주었으면 하는 사랑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꼰대’로서 잔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길을 걷고자 하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먼저 지치지 않기를, 자신의 뜻과 의지를 끝까지 펼쳐 나가주기를 응원하며, 때론 독려하며 그 길을 함께 해주고 있는 그 마음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하느님은 세상에 없는 것을 주시는 게 아니라 세상의 것을 ‘필요할 때’ 주시는 거야. 그래서 ‘우연’이란 말과 ‘기적’이란 말은 묘하게 뒤섞일 수가 있어.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겐 세상이란 ‘우연 같은 기적’들이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기적 같은 우연’이 되겠지.”


 “사람은 고통의 체험만으로 새로 태어나지 못해. 구원의 체험이 함께 있어야만 새로 태어날 수 있는 거야. (…) 체험이 견고해지려면 반드시 체험으로 이루어진 자기 삶의 변화가 성취감으로 이어져야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체험이 단순한 경험으로 남을 수 있어.”


 “성장한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사람들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거야.”


 비단 성직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고, 더 나은 세상이, 사랑과 희망과 평화가 넘쳐나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사회에 대한, 이웃에 대한, 내 주위에 대한 따뜻한 시선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 혼자 살아갈 수 없음에, 그리고 나를 지나 나의 아들 딸들이 이어나갈 세상이 좀더 행복하고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다른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하며 함께 좀 더 나은 방향으로 한걸음 내딛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내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잠시 비워두면 어찌 그리 번개같이 욕망이 들어와서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지 신기해. 그렇게 자리잡은 욕망은 언제나 ‘나’라는 주어를 사용해서 자신의 탐욕이 정당하다는 변명을 세우기 시작하더라.”


 “하느님을 표현하고 치장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살피는 게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란 거지. (…) 하느님에 대한 배신은 하느님을 버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오염시키는 일이었다는 거야.”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은 그만큼 무거운 이름이야. 사랑과 구원의 이름이란 세상의 절망과 아픔을 함께 품고 있는 이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야.”


 “사람에 대한 이 예의가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하는 원칙이고 질서이지 않을까?”


 구약성경에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며 그 창조 질서와 원리에 의해 만드셨다고 한다. 만드신 이후 창조질서대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는 세상이 ‘보시기에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의 욕심과 탐욕으로, 하느님께 다가설 수 있다고, 심지어는 넘어설 수 있다며 교만한 마음을 품고,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들을 탐하는 그 탐욕으로 인해 세상 질서는 혼탁해지고 또한 어지러워졌다고 한다.


 ‘사랑과 평화, 구원과 희망’의 세상을 꿈꾸며, 누구나 내 안에 들어와 계시는, 모든 순간을 함께 하시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으시도록 세상과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세상의 아픔과 상처에 나와 무관하다고 등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아픔과 상처에 공감하고 이해하며 감싸 안아주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꽃’이 피어날 수 있게 우리 모두의 동행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훼손된 관계를 복원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기억’과 ‘약속’일 거야. (…) 꼬여버린 현실의 관계를 관계의 기억이나 약속으로 풀어내는 것이 사랑을 꾸려가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일 거야.”


 “하느님과의 동행은 그렇게 고민 속에서 하느님의 꿈과 하느님의 길을 묻고 상의하는 여정이 될 수밖에 없어.”


 “상처가 별이 된다는 건 하루아침에 저절로 되는 게 아니겠지. 지난한 시간과 정성을 담는 과정을 거쳐야만 할 거야.”


 상처만이 가득한 마음에 희망이라는 꽃을 피울 수 있을지, 상처투성이의 세상이 희망과 사랑의 터전이 될 수 있을지.


 신부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그 과정이 너무도 지난하고, 쉽게 지치고, 당장 보이지 않는 결과로 인해 답답함의 연속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길을 시작해야 함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모두 함께 살아가는, 생존하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읽혀지는 속도에 비해, 그만큼 따라와주지 못한 마음가짐에 참으로 답답하기도 했지만, 이 답답함이 또 다른 새로운 웃음이 될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소중한 ‘빛’이 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부터 생각해 본다.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느끼며,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으며, ‘보시기에 좋으시도록’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함을 이루며, 더디지만 물러서지 않는 묵묵함으로 나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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