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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지 Oct 30. 2022

일단 해봐야지

 걱정과 고민으로 가득 찬 1년의 적응기를 거치고 나니, 남은 1년은 오로지 학교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생각이 조금 정리되니 수업에 참여도도 집중도도 모두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리고 찾아온 19년도 12월. 이제는 정말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다. 부르르 떨며 울려대는 핸드폰 알람을 밀어 해제한다. 배경화면에 선명히 찍힌 6:30이라는 숫자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이번에는 원하는 점수가 나왔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홈페이지에 들어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시험 칠 때 보다 더 쿵쾅거리는 심장이 나의 기대감을 대변한다. 지난 시험보다는 느낌이 좋다. 남들이 어렵다 했던 문제를 대부분 다 맞혔으니 이번만큼은 해냈으리라 생각한다. 침대에 엎드려 시험 홈페이지 화면과 눈씨름을 하다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 손가락을 움직인다. 과감히 ‘내 성적 확인하기’를 누르자 나의 지난 시험 기록들이 줄줄이 쏟아진다. 손가락으로 가장 윗줄에 있는 점수를 짚고 천천히 훑는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다시 한번 확인해 보지만 앞자리 숫자부터 8로 시작한다. 부풀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그라들고,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눈을 질끈 감는다. 크게 숨을 한번 쉬고 핸드폰을 집어던진다.

“쌍 도대체 나는 언제쯤 900 따냐 진짜 x 같다” 

 피곤한데 잠이나 더 자야겠다 싶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안되면 학원가라 했던 엄마 영의 말이 떠오른다. 다시 시작해야 할 공부를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발을 사정없이 구른다. 이것이 나의 한계인가 고민한다. 800점 후반대 점수만 벌써 네다섯 개를 가지고 있는 이 상황에 욕이 마구 쏟아진다. 이 정도면 운으로라도 한 번은 나올법하지 않나 생각한다. 시험 한 번에 오만 원씩인데, 대충 계산해봐도 좋은 학원 수강료만큼 사용했다. 도대체 시험료로 얼마를 더 태워야 하나 싶다. 더 독해야 하나? 아직도 부족한 내 실력에 스스로를 자책한다. 엄마 영에게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싶어 이마를 세게 한 대 때린다. 점수 나오기 전부터 목소리를 높였던 어제가 떠 오른다. 이놈의 입이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나불거렸던 걸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번만큼은 분명 붙었다. 유튜브로 강사들 리뷰를 봤는데 처음으로 확신이란 게 들었다” 말한 입을 힘껏 감싸 쥔다. 다음에도 이렇게 나불거리면 사람이 아니라 다짐한다. 

 답답한 마음에 이불을 걷어차고 저 멀리 나뒹구는 핸드폰을 주워 온다. 위로가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면 다시 힘을 낼 동기가 필요한 것일까. 대기업 학원 자유게시판에 들어가 초마다 갱신되는 리뷰를 읽는다. 이번 시험 완전 염전이라며 예상보다 한참 못 미친 자신의 점수에 불만감을 표한다. 다음 시험 신청하러 가야겠다는 댓글에 잠시 멈춰 한숨을 쉰다. 드디어 붙어서 졸업한다는 글도 속속히 올라온다. 열 번 만에 붙었다. H학원 강의 들었더니 한 번에 원하는 점수를 받았다. 찍은 것들이 다 맞았다 등. 부러움과 시샘에 다시 휴대폰을 집어던진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글 한 줄 읽고 찌질해진 내 모습에 혀를 찬다. 어쩌겠냐 싶어 오늘은 놀고 다시 집중하자 최대한 나를 타 이른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다. 커다란 무언가가 한참 동안 몸을 누르고 있던 것처럼 삭신이 쑤신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생각 하지만 너무도 선명한 기억에 도망치길 포기한다. 닫힌 문틈 사이로 자그마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릇끼리 사정없이 부딪치는 소리에 엄마 영이 부엌에 있음을 직감한다. 이불을 정리하고 침대에 앉아 오늘 나의 콘셉트는 무엇이 좋을까 고민한다. 얼굴에 철판 깔고 당당하게 나갈까. 아니면 비 맞은 고양이마냥 축 늘어져 나갈까. 처음 영과 마주하는 이 시기가 오늘 하루의 수위를 결정할 것을 알기에 신중해진다. 고심 끝에 적당함을 지키기로 한다. 기본적으로 자책을 깔고, 잘 본 것 같았는데 무엇인 문제였는가 하는 의심. 이 둘을 적당히 버무려 엄마 영의 동정을 끌어내기만 한다면 성공이다 다짐하고 방문을 연다. 환한 빛과 함께 영의 뒷모습이 보인다. 설거지를 하며 뉴스쇼를 듣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소파에 앉는다. 물소리와 앵커의 열변이 내 인기척을 지웠다. 손을 털며 뒤돌아보는 엄마 영과 눈이 마주친다. 씩 웃으며 일어났냐 묻는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리깐다. 평소보다 많이 차분한 분위기를 눈치챈 영이 한마디 한다.

“시험 성적 나왔어?”

애써 노력했던 분위기가 깨지고 웃음이 터진다. 어떻게 알았냐 물으니 그녀가 당연하다 대꾸한다. 떨어졌냐는 말에 영의 눈을 피한다. 몇 점 맞았냐는 물음에는 800점대 언저리라 대답한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말하며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라 한다. 

“도대체 언제 따는 거야? 공부 안 하고 노는 것 같더니…”

 차분함을 유지하려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목청이 조금 높아진다.

“엄마 있을 때는 엄마랑 노느라 그렇지, 엄마 나가면 거의 공부만 하거든요”

 그런데 왜 점수가 안 오르냐 하는 말에 다시 할 말을 잃는다. 혼자서 안되면 학원가라고 말했지 않았냐 말하는 엄마 영의 목소리도 조금씩 커진다. 20~30점 올리려 학원 가기에는 돈이 아깝다 말하는 나를 보며 엄마 영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다. 지금 공부한 지 얼마나 되었냐 묻는 말에 일 년이 조금 넘었다 답한다. 본인도 방법을 모르겠다는 듯 입 소리를 낸다. 별 수가 없어 보이는 엄마 영이 이번에도 누나를 들먹인다. 전화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라 하자 언짢은 표정으로 조금 있다 연락해보겠다 얼버무린다. 억울함에 영어 까막눈에서 이 정도까지 혼자 올라온 거면 잘한 거다 대꾸하자 엄마 영이 동의와 현실을 동시에 일러준다. 

“잘 한건 맞지 근데 네가 필요한 점수는 그게 아니잖아?”

 결과적으로 보면 너한테 필요 없는 게 수두룩한 거 아니냐며 그거 어디다 쓸 거냐는 말에 실없는 웃음이 나온다. 

“말로 그러는 것도 폭력이에요... 안 그래도 아픈데”

 그녀가 잘 좀 해보라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오늘따라 길어지는 엄마 영의 잔소리에 시선을 피해 창문 쪽으로 돌아앉는다.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공부하기 싫다 중얼중얼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온다.

“그래 네가 제일 짜증 나겠지”

 오랜만에 듣는 공감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발뒤축을 뜯던 영이 다시 한마디 한다 

“근데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잖아? 누가 하래?”

 사람을 들었다 놓는 그녀의 말재간에 성질나 소리친다. 

“아 진짜 엄마!”

     

 출근 준비를 하는 영을 졸졸 따라다닌다. 거의 다 왔는데 지금 포기하는 바보가 어디 있냐 말하며 그녀의 동의를 구걸한다. 이건 추진력을 얻기 위한 일보 후퇴였다. 다음에는 딸 수 있을 것이다 외치며 엄마 영을 괴롭힌다.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가서 네 할 것이나 하라는 손짓에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나한테 너무 무심하다 툴툴거리자 잡소리 말고 옷 갈아입게 나가라 말한다.

 거실 소파에 앉아 안방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흰색 바지와 차콜 카디건을 걸친 엄마 영이 나온다.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영의 뒤를 다시 쫓으며 질문을 쏟아낸다.

“수업은 몇 개예요? 몇 시에 들어와요? 저녁은 혼자 먹어요?”

 한 번에 하나씩만 물으라 말하는 그녀의 말에 하나하나 또박또박 다시 묻는다. 수업은 많고, 늦게 오고, 저녁은 같이 먹자 대답한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묻는 말에 아무거나 좋다 답한다.


무언가 많이 바뀔 거라 생각했던 나이 20살. 성년이 되면 용돈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다 입에 달고 살았던 엄마 영의 말과는 달리 팬데믹 상황과 휴식을 이유로 계속해서 무상 숙식을 제공받고 있다. 엄마 영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원래 다니던 회사를 나와 작은 사업을 하나 시작했다. 지금은 초등학생들 수학을 가르친다. 조금씩 늘어나던 수업이 열개에서 스무 개 지금은 서른 개에 육박했다. 많아지는 수업에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힘들다 한다. 어깨를 두들기는 엄마 영에게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다가가 약간의 감정을 담은 복수를 한다.

“엄마 그건 수업을 40개를 안 해서 하는 소리예요 수업을 40개를 하면 30개가 쉬워질 거예요”

호탕하게 웃으며 이런 불효 막심한 자식이 있냐 하는 말에도 당황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간다.

“저는 그렇게 컸어요. 누가 그렇게 가리켰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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