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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by 아트 서연

존 크랑코의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국내 초연했을 때에 페트루치오가 카테리나를 길들이는 과정이 가학적이라는 논란이 있었다. 결국에는 국립발레단이 다시 무대 위에 올렸을 때에는 존 크랑코 재단의 허락을 받고 안무를 수정해서 올렸는데, 이번에는 수정된 안무가 문제였다. 말괄량이 카테리나의 안무는 원작을 토대로 해서 왈가닥 아가씨특징을 살려 춤으로 표현한 것인데, 안무를 수정한 바람에 작품의 재미가 사라졌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이래저래 논란이 많았던 작품 <말괄량이 길들이기>. 그래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원작을 읽었다. 몇백년전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쉽지가 않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처럼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역시 본문에 주석이 없었다면 그 시대의 분위기와 시대상을 더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두 개의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희곡은 극 중의 극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술에 취한 상태로 곤히 잠이든 비참한 신분의 슬라이를 영주가 지나가다가 보고서 짖궂은 장난을 생각해 낸다. 하인들을 시켜 슬라이가 잠에서 깨자마자 영주라고 세뇌를 시킨 것인데, 슬라이가 그 동안에 단 한 번도 못 보았을 연극을 보게 하는 것도 영주의 짖궂은 계획에 포함된 장난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연극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시작된다.

이 작품을 읽을 때에 영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영국인들의 특징이 무엇이고, 어떤 유머코드를 발휘하는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나서 읽는 것이 조금이나마 불편함을 덜어줄 것 같다. 이 작품을 아무리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MBTI 성격 이론과 짝꿍처럼 붙어다니는 또 하나의 성격이론 '애니어그램'에 의하면 영국은 바로 '5번'유형이다. 애니어그램 이론에 의하면 각 나라에도 유형이 있다. 한국은 8번, 중국은 9번, 일본은 6번, 미국은 3번, 영국은 5번이다. 탐구심과 호기심이 많은 과학자 타입의 5번이 흥 많고 유머감각이 탁월한 7번 유형과 분열이 되면 '블랙유머'를 구사하게 된다. 그래서 이 5번 유형이 블랙유머를 구사하게 되면 엄청 웃기면서도 5번 특유의 지적이고 냉소적인 유머가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말괄량이 길들이기> 역시 그렇다. 유명하다고 해서 읽었는데 심기는 불편해지고, 마음은 불편한데 내용 전개마다 '킥'이 있어서 재미가 있다. 특히 원서로 읽으면 그 재미난 '킥'인 언어유희와 위트를 한껏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너무 심각하게, 진지하게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차피 셰익스피어도 이 작품을 액자식으로 구성해서 스토리텔링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희곡에 나오는 캐릭터들과 대사들은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말괄량이 큰딸 카테리나에게는 구애하는 청년이 아무도 없고, 온순하고 순종적으로 보이는 비앙카에게는 청혼하는 청년들이 차고 넘친다. 급기야 딸들의 아버지인 밥티스타는 비앙카에게 구혼하러 온 청년들에게 큰딸 카테리나가 시집가기 전까지는 비앙카도 결혼시킬 수 없음을 선언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괄량이'라는 한국어 번역이 캐릭터에 비해 너무 예쁘게 번역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 속에서 카테리나는 안하무인이다. 선을 넘으면서 막말을 하는 캐릭터인데,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렇다고 동생 비앙카가 청년들이 보는 것처럼 마냥 온순하고 순종적인 캐릭터인 것만은 아니다. 결혼시장에서 자신이 유리한 포지션을 취하기 위해 내숭을 떠는 조용한 여우과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은근히 말 속에 가시가 있어서 언어로 칼춤도 잘 춘다. 하지만 비앙카의 겉모습에 잘 속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그렇다고 비앙카에게 속는 청년들이 마냥 순진한 것도 아니다. 카테리나에게 청혼한 페트루치오는 대놓고 신부의 지참금에 눈독을 들이며 비앙카에게 구혼하려는 청년들 역시 신부와 신부의 지참금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속이고 속이는 속물들이다. 이런 모습들은 오늘날에도 또다른 형태로 비슷하게 재현되니 대입해서 작품을 감상하면 재미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내면,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보다는 속물들이 더 많은 세상이다. 그나마 문학작품이 순한 맛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번역가님은 '옮긴이의 말'에서 남편 페트루치오의 가학적인 길들이기에 카테리나가 표면적으로 굴복하는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고 쓰셨지만 나는 '꿈보다 해몽'이라고 생각한다. 페트루치오의 방법은 분명 학대가 맞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에서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제 아무리 카테리나여도 살기 위해 복종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카테리나의 본질도 바뀌었을까?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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