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위적인 발레 안무가들 중 조지 발란신과 모리스 베자르에게는 한 명의 공통된 뮤즈가 있었다. 하지만 발란신과 베자르는 그 뮤즈를 대하는 방식이 상반되게 달랐다. 발란신은 그 뮤즈를 새장 안에 가두려 했고, 베자르는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도록 배려했다. 결국 그 뮤즈는 발란신에게는 잡히지 않은 새였고, 베자르에게서는 잠시 머물렀다가 금방 날아갔다. 그 뮤즈는 바로 미국 발레의 선구자이자 지금도 살아있는 전설의 발레리나 ‘수잔 패럴’이다.
늙은 안무가 발란신이 사랑했던 뮤즈 ‘수잔 패럴’
미국의 안무가 조지 발란신이 함께 작업했던 발레리나들 중에서 수잔 패럴이 가장 완벽한 체형에, 중력의 영향을 덜 받고 발란신이 생각한 ‘춤으로 그리는 음악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한 발레리나이다. 평소 발레리나들을 여신으로 생각했고 이미 발레리나들과 결혼과 이혼을 몇 번이나 반복했던 발란신은 패럴에게도 러브 레터를 보냈다.
그녀 역시 발란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다만 ‘사랑’에 대한 생각과 표현하는 방식이 발란신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발란신에 대한 사랑을 ‘음악의 이미지를 춤으로 표현하는 발란신의 생각’을 읽고 ‘그 생각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발란신 곁을 떠난 후 베자르의 곁에서 잠시 머물렀던 새
결국 그녀는 현실에서는 다른 사랑을 선택했다. 같은 발레단의 발레리노와 결혼을 한 후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발레 인생은 끝날 것만 같았다. 그 때 유럽에서 한줄기 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20세기 발레단을 이끌고 있었던 발레 혁명가 모리스 베자르가 그들을 초대한 것이다.
베자르는 발란신과는 달리 그녀를 자신만의 뮤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마음껏 춤을 출 수 있도록 배려했다. 훗날 베자르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패럴을 자신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중요한 사람 중 하나로 단지 잠시 빌린 것일 뿐,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천재로서, 예전에도 앞으로도 다시는 얻지 못할 천재로 그녀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패럴 역시 여러 언론에서 베자르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했다.
다시 돌아온 뮤즈
다시 만난 발란신과 패럴은 ‘춤’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표현했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그들의 사랑의 감정을 발란신은 자신이 그녀를 위해 만든 작품에서, 그녀는 그가 자신을 위해 만든 작품에서 표현했다. 패럴은 예술가의 환상 속에서 존재하는 수동적인 뮤즈가 아니라 끊임없이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춤을 통해 예술가에게 존경심과 사랑의 감정을 표현했다. 예술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그녀의 생각이 예술이 된 작품에서 그녀가 춤추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 순간에 또 다른 자아가 그녀에게 깃든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신들린 듯한 그녀의 모습이 옛날 발레리나인데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라벨의 음악을 통해 억눌렀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발레 <치간느>
발레에서 스토리를 제거하고 오직 순수한 춤선으로만 음악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던 조지 발란신은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즐겨 사용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뮤즈 수잔 패럴을 위해서라면 차이코프스키나 모차르트, 라벨의 음악을 이례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발란신은 그의 곁으로 다시 날아온 뮤즈 수잔 패럴을 위해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치간느>를 사용해 발레 작품을 만들었다. 프랑스인의 감성으로 바라본 헝가리 집시들의 삶의 애환과 즉흥성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라벨의 <치간느>. 그러나 라벨의 음악을 춤으로 표현한 발란신의 <치간느>를 보고 있으면 헝가리 집시들의 아련함과 열정보다는 현실에서 억눌러야만 했던 격정과 유희를 표현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두 개의 영혼이 하나로 깃든 발레 작품 <치간느>
1975년에 발표한 발레 <치간느>는 남녀 주역 무용수 2명과 코르 드 발레 8명으로 구성된 작품임에도 수잔 패럴의 독무가 초반부터 길게 이어지고 있다. 어슴프레한 달빛 아래에서 바이올린의 중저음의 허스키한 소리가 흘러나오면 붉은 치마를 입은 수잔 패럴이 등장한다. 곧이어 자유분방하게 요동치는 선율에 패럴이 신들린 듯이 팔을 흔드는 모습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집시 음악의 자유롭고 거친 느낌을 패럴은 다채로운 방향 전환과 즉흥성이 가미된 스텝, 팔과 상체의 열정적인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있다. 집시들의 애환과 낭만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라벨의 <치간느>는 패럴의 춤을 통해 역시 발란신이 사랑했던 뮤즈의 여성성과 야생마같은 이중적인 매력을 표현하고 있다. 약 11분정도 되는 작품에서 거의 5분이나 달하는 패럴의 긴 독무는 라벨의 음악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안무가의 음악적인 표현력이 그녀의 춤으로 발현되면서 예술을 통해 그들의 복잡했던 사랑의 감정들을 분출하고 있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넘어서서 영적으로 하나가 된 그들만의 사랑의 방식은 발레 불모지였던 미국 발레를 발전시켰고 완성해나갔다. 미국 발레의 선구자 조지 발란신과 세기의 발레리나 수잔 패럴의 가슴 저미는 러브 스토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애틋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