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시작은 분명 깔끔한 백지였다 그러나
갈수록 느는 건 찍찍 그은 선, 지우개가루, 그리고 한숨뿐.
너무도 많은 개념과 공식을 머릿속에서 짜내려니
모든 게 술술 새어나가 텅 빈 뇌라는 부작용이 생겼다.
시간은 째깍째깍 급한 맘에 날 부르는데
할 수 있는 거라곤 멍하니 문제를 내려다보는 것.
어제는 그래도 영어정도는 됐는데
왜 오늘은 또 외계어인 걸까.
마음먹고 펜을 들어도 곧 떨구고 만다.
엔딩을 뒤집는 선 하나 차이가 그렇게도 무섭다.
시작은 분명 종이만 백지였다 그러나
점점 내 머리도, 시간도 텅 빈 백지로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