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
한 사람의 우연한 방문을 계기로 우리는 단골가게의 미용사와 손님으로 대면하게 된다. 처음에는 혼자 오고 그다음에는 남편과 함께, 결국에는 아이까지 대동하여 결국 나는 온 가족의 헤어를 전담하게 되는 영광을 거머쥐게 되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꾸준한 만남을 이어오던 우리는, 어느샌가 국어사전의 얇은 속지처럼 조심스럽고 아슬하게 한 장씩, 또 한 장씩 쌓여가며 견고해지는 과정을 겪게 된다. 마치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한 글자씩 타이핑된 이야기들이, 한 권의 에세이로 완성되어 가는 느낌과도 같을 것이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우리 미용실을 다니게 되기까지의 긴 절차를 거치고 나면 매 주말 사랑으로 가득 찬 따듯함이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애틋한 순간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미용사에게 가장 큰 훈장은 오래 다니시던 고객님이 어머님을 모시고 올 때가 아닌가 싶다. 엄마를 따라 미용실에 늘 함께 오던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야 허락되는 평일 오전의 여유로운 시간. 가족들을 각자의 세상으로 안전하게 보내고 나서야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순간이다.
일찌감치 예약해 둔 미용실 오전 첫 타임에 친정어머님 손을 이끌고 들어오시는 단골고객님의 모습을 바라본다. 한 가정의 책임감과 무게에서 해방이라도 된 듯 오늘은 그녀 또한 영락없는 딸의 모습이다. 내 가족들 챙기느라 늘 뒷전으로 미루어놓았던 친정어머님을 위해 오늘만을 기약하고 있었을 따님의 마음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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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런거 몰라요 알아서 해주세요
어머님의 평소 취향과 어느 정도의 손질을 하실 수 있는지 등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상담태세에 돌입한다. 헤어스타일 상담 내내 여러 가지 질문들이 쏟아지게 되는데, 이때 어머님들께 가장 많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난 그런거 몰라요. 알아서 해주세요 “.
내 아름다움을 위해 누군가와 상담을 한다는 것이 못내 어색하기만 한 어머님의 눈동자는 길을 잃었다. 나에게 쓰는 시간과 돈이 사치같이 느껴져서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돌아섰던 세월들이 있었으리라. 그 시간들을 어른이 된 당신의 딸이 안아주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한 세대만 올라가도 가정의 모든 일과 책임의 잣대가 여자에게 돌아왔던 시절이 있다. 시집살이의 시대라고도 불리는 부모님의 세대. 그런 숨 막히는 시대에 태어난 엄마를 가여워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나는 그렇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어 다행이라고 안도해야 하는 걸까 고민할 시간도 없이 젊은 날 꽃 같았던 어머니는 이 어색한 공간에서 다 큰 딸만을 의지하며 앉아계신다.
방문 전 미리 전화해서 가격은 꼭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시는 따님과, 많이 비쌀 텐데 가격이 얼마인지 몰래 좀 가르쳐달라는 어머님 중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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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최신유행하는 머리는 다 해보는 어린 내 자식의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에 늘 그리움처럼 피어올랐을 한 사람의 얼굴. 세상 모든 일을 해결해 주던 마법사이자 나의 세상이었던 한 여자. 항상 내 뒤에서 커다란 그늘이 되어주었던 엄마의 나이가 되어보니, 어린 나를 지켜주던 엄마의 나이가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머리 하는 내내 곁을 지키고 있던 따님의 마음은 엄마에 대한 고마움일까 미안함일까, 아니면 두려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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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보다 왜소해져 버린 고마운 분신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 그 마음을 어머니에게 온전하게 전하고자 고민했을 한 여자의 마음과, 결국 사랑의 매개가 나의 직장으로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겸허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앞으로도 내가 걸어가는 미용은 머리카락이 아닌 사람을 향해있기를 원한다. 내가 꾸린 공간이 한 사람의 기억 속에 아득한 추억으로 자리하길 바라며 오늘도 여백을 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