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구멍이 났다

원형탈모

by 이현지





구멍이란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를 의미한다. 무엇에 의해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뭐든 할당량에 비례하여 지나치게 사용되면 구멍이라는 게 생겼던 것 같다. 그게 손수건이던 아스팔트바닥이던, 마음이 던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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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방문하신 고객님이 멋쩍은 얼굴로 말씀하신다. “신경 쓰는 일이 많아서 바빴어요.” 간단한 인사와 디자인에 대한 상담을 들어간 후,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커트를 들어가려고 섹션을 나누게 되면 숨겨져 있던 두피가 얼굴을 내비친다. 보이는 겉모습을 헤집고 들어가 그 근원을 대면하는 것이 이렇게 과감해도 될 일이었던가. 겉모습을 헤집고 들어가 첫 단추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는 과정은, 평생을 연습해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매번 해본다.


뒤통수 쪽의 옥시피탈 존, 깔끔한 일직선으로 따여진 섹션 사이로 동그랗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무언가를 마주하게 된다. 원형탈모. 일종의 자가 면역질환으로 몸이나 정신이 피로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질환이다. 새삼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고객님의 얼굴을 살펴보게 된다.


몇 달에 한번 방문하는 곳,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한번 두 번이 쌓이면 순식간에 몇 년을 함께 지내버리게 되는 곳이 미용실이다. 겉으로는 내색하지는 않지만 고객님의 안색만 보아도 요즘 근황을 알 것 같은 세심한 눈초리를 가지게 된다. 긴장이 되는 것은 고객의 눈초리에도 미용사의 근황이 쉽게 읽혀버린다는 사실이다. 얕지만 깊고 무던하지만 외면할 수는 없는 우리의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세상의 몇 안 되는 특권 아닌 특권이기에 길게 허락되는 인연이 아닐까 싶다.


조용히 커트를 하는 동안 그것이 또 다른 곳에도 파생되어 있는지 훑어보며, 몸과 마음이 피로했을 고객님의 시간들을 짐작해 본다. 섣불리 원형탈모 이야기를 꺼냈다가 마음에 상처라도 입게 되면 어쩌지 모른 척을 하고 싶다가도,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말해 줄 사람이 없을 거라는 판단 아래 정신을 번뜩 차린다. 굳이 들추어야만 발견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면역저하의 표식. 요즘의 당신이 마냥 평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본인조차 모르고 지내게 될까 봐 아는 척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요즘 날씨가 이상한데, 두피는 괜찮으신가요?"




적당한 핑계로 둘러대기에 날씨만 한 소재가 없다. 1년 365일 동안 언제나 이유가 될 수 있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날씨가 더워서, 추워서, 비가 와서, 눈이 와서, 일교차가 커서, 미세먼지가 많아서, 낮이 길어서, 밤이 길어서, 그래서 그런 거니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날씨가 그래서 두피가 그럴 수 있어요. 안 그래도 머리가 길어서, 또는 짧아서 걱정했었는데 마침 당신의 두피에서 발견된 것이 원형탈모라 유감입니다.라는 말을 아주 예쁘게 전해드리는 과정은 미용사에게도 조마조마한 순간이다. 대수롭지 않은 듯 무덤덤한 얼굴 뒤로, 고객님께 상처라도 주게 될까 봐 호들갑스러운 아줌마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원형탈모 소식에 깜짝 놀라며 요즘 근황을 말씀해 주시는 고객님들. 다양한 사정들이 있겠지만 육신이 과부하된 상태인 것만은 틀림없다. 일개 헤어디자이너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잠들기 전 아무런 걱정 근심 없는 마음의 평온이길 바란다.


컷을 마무리하며 시간적 여유가 되는지를 여쭤본 후 조용히 두피케어앰플을 서비스해 드린다. 아로마향과 멘톨성분이 가득 들어있는 두피앰플이 고객님의 모공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복잡함을 정리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가끔은 작은 행동 하나가 백 마디 말보다 더 좋은 응원의 메시지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늘 아래 찰나의 휴식을 이곳에서 꼭 누리고 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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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뒤 다시 만난 고객님들의 대부분은, 원형탈모가 많이 호전되어 있거나 백 프로 완치가 된 상태로 재방문을 해주신다. 담당 미용사를 닮아 역시나 어려운 역경도 잘 극복해 내시는 기특하고 고마운 고객님들이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던 많던 혹은 엄마뻘이던, 힘든 시간을 잘 견뎌내 준 고객님의 세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본다.


자신의 아픔을 방관하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의지를 가지는 고객님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단순히 나누었던 몇 마디 대화 속에서도 느껴지는 긍정의 세계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을 지난 시간들의 결과였을 것이다. 늘 자신에 대한 고찰을 하며, 때로는 마음에 구멍이 날지언정 까짓 거 메꾸고 다시 걸어가면 그만이라는 울트라멘탈의 손님들은, 내가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야 할지 삶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고마운 등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들에게 배운 묵묵한 걸음걸음에 나는 오늘 또 한 번 성장한다. 품격 있는 모습의 노인으로 늙어가기 위해 오늘을 살아간다. 상황이 소란스러워도 내 머리정돈을 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 그리고 충격적인 원형탈모의 발현소식에 미소를 잃지 않는 마음의 여유까지. 나도 앞으로 꼬여진 실타래를 풀어내기 위해 뒤 돌아볼 줄 아는 용기를 가져보려 한다. 그저 좋은 경험이었다 웃어넘기고 수습해 버리면 그만인 모든 사건들에, 다양한 이유를 갖다 붙이며 오래 붙들고 있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원형탈모를 대하는 멋진 분들에게 배운 삶의 지혜이다. 작은 미용실에서 별게 다 인생공부가 된다니 복에 겨운 나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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