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서 만난 기적

한강아이

by 이현지







학원을 가기 위해 내려야 했던 정류장을 지나쳐 종점까지 가보자는 다짐은 세상을 향한 나의 첫 도전이었다. 책가방을 매고 홀로 한강에 발을 딛던 날, 잔잔한 물결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바람은 선선했다. 기분 좋은 공기만큼이나 자유로워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작은 아이는 한 가지 믿음을 가지게 된다.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다."





두 발로 딛고 선 곳에서 내 두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저 아름다웠다. 그때의 어린 내가 온몸으로 흡수해 버린 믿음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큰 선물로 남아있으니 나라는 사람은 복을 타고난 것이 분명했다.



한강을 좋아했던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책가방을 매고 틈틈이 그곳을 걸었고, 17살이 되고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강을 거쳐 등하교를 하게 되었다. 매일 뜨고 지는 태양처럼 묵묵한 한강의 하루하루를 닮아가다 보면, 그렇다 할 특별함 하나 없이 무난했던 나날들이 큰 기적이었음을 깨닫게 되고는 했다. 일렁이는 노을과 무심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의 형체, 고요히 흘러가는 강물의 일관된 침묵. 이곳은 나에게 늘 평온한 기적을 안겨주었다.



등 떠밀리 듯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미용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다. 기적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또 다른 기적의 산물들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드넓은 세상에서 50평 남짓한 이 작은 공간에 모인 모두의 인연을 어떻게 풀어 해석할 수 있을까. 어떠한 이론으로 우리의 만남이 구색을 갖추게 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우리는 미용사와 손님 또는 사장과 직원으로 만나 유효기간이 존재하는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나를 스치는 모든 이들이 기적 같은 연결고리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 소중함을 망각하게 될 때면, 나는 한강이 내게 주었던 믿음 하나를 기억해 내려 노력한다. 이제는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익숙한 들숨과 날숨의 호흡, 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내 앞에 서있는 타인의 존재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기적 같은 일임을 말이다.



책가방을 매고 학원가는 길에, 샛길로 빠져 한강에 닿게 된 열세 살의 어린아이를 추억한다. 교복을 입고 거닐던 한강 길에서, 어느덧 성인이 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웨딩촬영을 하던 날을 기억한다. 이곳에서 배운 인생의 진리를 토대로 익숙함과 당연함에 속아 기적 같은 하루를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누군가를 미워하는데 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상대에게 미운 감정이 올라오면 그에게서 되려 배움을 찾아보기로 다짐했다. 그러자 마주한 작은 인연 하나에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즐비하게 일어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만남이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음을 각인하게 되었다. 늘 불안함으로 감정의 기복이 컸던 나는 거칠게 날이 선 돌멩이의 모습이었다. 인생을 행군하며 이곳저곳 부딪히고 깎여 다듬어지는 과정을 겪게 될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고 삶은 기적이라고 말해주던 한강의 냄새를 떠올렸다. 상처투성이로 불길에 내던져질 줄 알았던 돌멩이는 치열하게 부딪힐 때마다 반들반들하고 둥근 모양으로 다듬어졌고 이제는 흐르는 강물 속 어떤 장애물을 만나게 돼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한강에게 자유로운 30대를 선물 받은셈이다.



둥글어진 내 마음과 더불어 달라진 것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에 울고불고 속상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오는 인연을 막지 않고 가는 인연 또한 막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내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이야기들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행여나 내 험담이 들려오게 되어도 그 판도라의 상자를 더 깊게 파헤치지 않고 강물을 타고 유유히 흘러가게 두었다. 누가 방아쇠 당긴 총을 겨누고 있으면 나를 쏴라 하며 그 앞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닌, 무시하고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줄 다른 예쁜 것들을 찾아 떠났다. 나는 자유로웠고 밝은 표정을 지니게 되었다. 더 이상 관계에 속박되지 않고 감정의 노예로 끌려다니지 않게 되자 미워했던 사람들마저 측은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한강에 데려가고는 한다. 예쁘게 노을 지는 한강에서 내가 배운 자유로움을 누군가도 볼 수 있다면 그 또한 내 삶의 이유가 될 테니 말이다. 공평하게 주어진 하나의 눈코입이지만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농도가 다름을 알게 된 후부터, 세상이 주는 선물을 잘 담아내기 위해 마음의 그릇을 넓히려

노력하고 있다. 나의 남은 여생은 그것만을 위한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적 같은 하루하루를 묵묵하게 걸어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지루하기까지 한 무탈한 하루는 누군가가 꿈꾸던 기적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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