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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쌈!

by 은하육수

나이가 들수록 12월 25일에 대한 감흥은 옅어지지만 그래도 곳곳에 펄떡거리는 생명을 연상하는 빨갛고 초록색의 풍경이나 신나게 울려 퍼지는 캐럴이나 아이들의 기대하는 눈빛을 보면 성탄절의 기류에 나도 살짝 발을 담가 기분을 내본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세상이 뒤숭숭해서 그런지 분위기도 약간 침울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표정은 살짝 들떠있다.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가 설렜던 게 양념통닭을 먹을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요즘처럼 외식문화가 많지 않고 집안 사정도 그리 넉넉지 않을 때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 때만 바깥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무뚝뚝한 아빠가 그날은 아주 인자한 표정으로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면 나와 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양념통닭이요!”를 외쳤다.


통닭이 언제 오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면 대문밖에서부터 벌써 그 달짝지근한 양념향이 우리의 코를 간지럽혔다. 큰 방에 미리 세팅해 놓은 테이블(이라기보단 밥상)에 뜨끈한 양념통닭 상자를 놓으면 온 가족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우린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사람들처럼 둥글게 모여 앉아 경건하게 배식을 받았다. 닭다리는 할머니와 아빠 몫이었지만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원망의 눈빛을 보냈지만) 아빠와 남동생의 차지가 되었다. 야들야들한 닭날개와 살이 많은 부분은 나와 여동생 차지였고(여동생은 입이 짧아 거의 내 몫이었다) 나머지 부스러기나 목뼈는 엄마 거였다. 엄마는 무슨 주문처럼 자기는 목뼈가 제일 맛있다며 빨아먹었고 나는 그걸 진심으로 알아들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산타할아버지를 가장한 엄마, 아빠가 선물을 준다고 하지만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동생들의 볼멘소리에 맛있는 거 먹었으면 됐지 무슨 선물타령이냐며 핀잔주는 엄마에게 나는 큰딸로서 차마 선물의 '선'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만 되면 혹시 뭐가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머리 위를 더듬거리곤 했다.


어느 크리스마스도 똑같이 머리 위를 더듬거리며 미리 서운함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뭔가 딱딱하고 차가운 게 만져졌다! 나는 눈을 번쩍 뜨고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장지에 곱게 싸인 선물이 나를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쿵쾅대는 심장소리를 느끼며 선물 포장지를 마구 뜯었는지, 아님 포장지가 찢어지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뜯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처음 받아본 크리스마스 선물에 몹시 들떠있었던 건 떠오른다.


선물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였다. 당시 최고 인기선물이었던 바비인형이나 예쁜 레이스 옷이 아니라 살짝 실망했지만 이런 티를 내면 내년 크리스마스 선물은 없을 줄 알고 더 오버하며 좋아했다. 그리고 마음의 반은 정말 진심이었다. 산타가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딸의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만들어주기 위해 선물을 준비했을 부모 산타에게 찡한 감동과 감사를 느꼈다.




준후에게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추억을 만들어주고자 이번엔 내가 원하는 선물(보통 교육용)이 아닌 준후가 원하는 공룡 자석 놀이를 사서 이브날 준후 머리맡에 놔뒀다. 크리스마스가 정확하게 어떤 날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산타할아버지로 분장한 선생님들이 선물을 주는 걸 경험해 봐서 그런지 크리스마스는 뭔가 좋은 날, 신나는 날인 걸 대충 아는 모양이었다.


“준후야, 메리 크리스마스!”

내 아침인사에 시큰둥하게 쳐다보는 준후에게 "침대에 뭐가 있지? 선물이네!" 하며 내가 호들갑을 떨자 그제야 눈빛을 반짝이며 자기 머리맡에 있던 선물을 살폈다. 다행히 마음에 들었는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그것만 주야장천 갖고 놀았다.


“준후야, 메리 크리스마스!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해봐.”

준후는 긴 단어에 잠깐 주춤하더니 곧 따라 하기 시작했다.


“메리... 메리 크리쌈!”


7음절인 단어를 자기 딴엔 저렇게 들렸는지 아님 발음이 저렇게 밖에 안 나오는 건지 하여튼 '~스마스'를 순식간에 '쌈'으로 만들어버린 준후의 말에 나와 남편은 까르르 웃었다. 우리 가족의 크리스마스 구호는 "메리 크리쌈!"으로 정해졌다. 이렇게 크리스마스의 즐거운 추억이 준후에게도, 나에게도, 또 한 겹 씩 쌓여갔다.


내년에도 따뜻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길. 메리 크리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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