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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지 않은 이야기

by 은하육수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아빠 직장에서 부부동반으로 미국 연수 프로그램에 엄마, 아빠가 뽑혀 가게 됐다. 그 당시 해외여행이 흔치 않았고 가까운 일본도 아닌 미국으로 간다는 게 마냥 신기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엄마, 아빠도 신나 보였지만 나도 부모님이 미국 가신다는 걸 친구들이며 이웃들에게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며 괜히 들떠 있었다.


미국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 아빠가 갑자기 나를 방으로 불렀다. 할머니 말씀 잘 듣고 동생들도 잘 돌봐야 한다고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들었는데 또 그 소리를 하려나 싶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빠 앞에 앉았다. 아빠와 나 사이에는 종이와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


"이거 우리 집문서랑 보험증서, 통장들이야. 이게 우리 집 전 재산이야."

나는 갑자기 아빠가 뭘 잘못 먹었나 싶어 아빠 얼굴을 멀뚱히 쳐다봤다.

"이거 보관하고 있다가 혹시 엄마, 아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네가 잘 처리해야 한다. 여기,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아빠가 다 정리해 놨으니 이대로 하면 돼. 알았지?"


아빠가 적은 편지에는 통장 비밀번호며 부동산 주소며 어린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용어들과 숫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편지 맨 마지막 장엔 아빠가 1번, 2번 이렇게 순번을 매겨 일이 발생했을 때 내가 뭐부터 해야 하는지, 어떤 친척에게 의지하면 좋은지, 보험금은 어떻게 타야 하는지 등이 적혀 있었다. 얼마나 힘을 주어 꾹꾹 눌러썼는지 점자책처럼 글자를 따라 종이가 올록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무슨 일이란 게 정확히 어떤 건지 아빠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암묵적으로 그게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에야 우리 아이도 벌써 비행기를 몇 번이나 타봤지만 그 당시는 비행기 타고 해외 나간 사람을 우리 주변에서 찾기 힘들었다 . 비행기 탄다 하면 미지의 세계를 탐험시켜주는 우주선처럼 궁금하고 신기한 존재이면서도 그만큼 불안하고 어딘가 섬뜩했다. 비행기 사고를 뉴스로 본 적도 있어 불안감은 더 크게 다가왔다.


나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던져놓고 아빠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여행가방을 쌌지만 나는 무서웠다. 안 가면 안 되냐고, 그냥 가지 말라고 캐리어를 싸는 엄마, 아빠를 뜯어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부모님은 공항으로 떠나버리고 없었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동안 숙제도 안 해도 되고, 보고 싶은 만화도 실컷 보고, 과자도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마음이 초조하고 무거웠다. 일찍 자자는 할머니에게 뉴스 좀 보고 자자면서 혹시 무슨 사고가 났는지, 미국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벌써 그 뉴스가 지나간 건 아닌지하며 조마조마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얼른 부모님이 귀국하기만 눈 빠지게 기다렸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엄마, 아빠를 잃는다는 슬픔과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단 나에게 떠넘겨진 짐들에 내가 질식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철부지 나는 나밖에 생각할 줄 몰랐다.


다행히 부모님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셨고 화려한 라스베이거스와 웅장한 그랜드 캐년, 북적이는 미국 도시를 침 튀기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런 부모님을 바라보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땐 그랬지 하며 우스갯소리로 치부해 버렸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전혀 우습지 않은 이야기가 돼버렸다. 그 때의 기억은 이제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간직되었다.


2024년 12월 29일.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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