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후와 저녁 먹고 공부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눈 내린다!’
하얀 눈발이 내리는 사진과 함께 남편이 카톡을 보냈다. 눈? 갑자기 웬 눈? 나는 남편이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해 한 말인 줄 알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벌컥 열었다.
찬바람이 훅하며 덮쳐 잠시 정신을 못 차리다 눈을 떠보니 정말 하늘에서 하얀 눈이 소담하게 내리고 있었다. 눈은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는지 나무며 잔디밭이며 아파트 단지가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다. 금방 그칠 눈이 아니었다.
“준후야, 눈 보러 나가자!”
나는 얼른 책을 덮고 잠옷 위에 츄리닝을 후다닥 입었다. 나가기 싫다는 준후에게 억지로 패딩잠바를 입히고 목도리에 장갑을 챙겨 우리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징징거리던 준후는 막상 밖으로 나와 세상이 하얗게 변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노래에서만 듣던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자기 눈앞에 실제로 떨어지는 게 신기한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엔 물기를 약간 머금은 밀가루 가루 같은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우리의 머리와 어깨에 가만히 앉았다 사라졌다.
진귀한 눈구경에 아파트에 있는 아이들 모두 뛰쳐나온 것처럼 밖은 왁자지껄했다. 급하게 나온 모양인지 파자마에 슬리퍼 차림의 아이도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입을 헤에- 벌리며 하얗게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나는 지방 중에서도 따뜻한 지역에 산다. 지형상 눈이 많이 오지 않는 곳이라 여기는 겨울에 눈 구경하기가 힘들다. 지난해 11월 수도권과 강원도, 충청, 전라권과 제주도에 내린 폭설로 뉴스나 브런치에서 눈 이야기가 한참일 때 우리는 ‘눈폭탄이 뭐죠’ 이러고 있었다. 모두들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지만 정작 내가 다른 나라에 살고 있었다.
눈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도 눈은 항상 비로 바뀌어 내리기 일쑤였고 눈이 내려도 1, 2분 오다 그칠 때도 많아 솔직히 '눈이 내린다'는 표현을 쓰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우리는 눈 내린 풍경에 대한 환상도 없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눈이 안 내리는 만큼 눈에 대한 고충은 다른 지역보다 크지 않지만 안 오는 만큼 우리는 눈에 잼병이었다. 다른 곳은 눈이 쌓이면 빨리 조치를 취했지만 우리는 개미눈곱만큼 조금 내린 눈에도 대처가 미흡했고 우왕좌왕했다. 교통대란에 빙판길에 사람들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스키장이나 다른 지역에 가지 않는 이상 눈을 볼까 말까 한 겨울도 많아 겨울은 그저 삭막하고 추운 이미지로 남을 뿐이었다.
그런 우리 지방에 이런 탐스런 눈이 내리다니!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면 우습고 신기한 광경이겠지만 어른이고 아이고 너나 할 것 없이 다 뛰쳐나와 눈구경을 했다.
아이들은 바닥에 쌓인 눈을 손으로 꼭꼭 눌러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좀 큰 아이들은 자기 머리통보다 더 큰 눈덩이를 굴리며 즐거워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찾아 누가 먼저 발자국을 남기나 시합하기도 하고 하얀 눈을 배경으로 엄마에게 이쁘게 사진 찍어달라며 포즈 취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 준후는 눈밭을 달리는 강아지처럼 마구 소리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정작 산책 나온 강아지들은 얌전히 있는 걸 보고는 누가 강아지고 누가 사람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우스웠다.
해맑게 눈을 보며 좋아하는 아이들 옆에서 어른들은 내일 기온이 엄청 떨어지는데 이게 다 얼면 어쩌나, 빙판길에 출근은 어떡하냐며 걱정밖에 할 줄 몰랐다. 춥다고 빨리 들어가자는 엄마와 계속 눈밭에서 놀 거라며 뻗대는 아이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목격되었다. 쉽게 그치지 않는 눈을 보며 나도 즐거움보다는 걱정이 먼저 앞서는 걸 보고 나도 늙었구나 싶었다.
서울에 있을 때 눈 구경을 실컷 했다. 다른 동기들은 또 눈이냐며 투덜거렸지만 눈 내리는 광경을 잘 볼 수 없었던 나는 남몰래 하얗게 쌓인 눈을 바라보며 신기해하고 조금 들떠 있었다. 움푹움푹 발목이 들어갈 정도로 눈이 내리면 신발이며 발이 젖어 찝찝하고 추웠지만 걸을 때 뽀드득하는 소리는 얼음을 와그작 깨무는 것처럼 상쾌하게 들렸다. 새하얀 눈 위에 서있으면 우중충한 나를 환하게 비춰주는 조명 같아 기분이 해사해졌다. 어린 시절 보지 못한 눈을 그때 참 많이 보고 실컷 즐긴 것 같다.
오늘 아침에 보니 어제 아파트 단지에 곱게 쌓인 눈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저 멀리 있는 산에 드문드문 하얗게 쌓인 눈만이 어제 내린 눈의 흔적이었다. 다행히 눈은 밤새 내리지 않았고 골목에만 드문드문 빙판길이 생겼을 뿐이다.
따뜻한 남쪽나라에 눈이 오면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