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식욕이 남달랐다. 100일 무렵 어른들이 먹는 반찬들을 넙죽넙죽 받아먹었고 나보다 한 살 많은 사촌 오빠보다 많이 먹어서 눈치 아닌 눈치를 받았단다. 명절날 전을 구워 채반에 식히는 사이 내가 보행기를 타고 돌진해 전을 반이나 주워 먹어 배탈이 난 일화는 엄마 인생의 웃긴 에피소드 중 하나로 남았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잘 먹으니 살이 금방 차올랐고 나는 또래 여자아이들보다 성장이 빨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브래지어를 착용하기 시작했고 앉으면 등에 선명하게 불룩 튀어나온 끈을 남자아이들은 재밌다며 마구 잡아당겼다. 나는 날씬하고 납작한 다른 아이들의 가슴이 부러웠고 내 속도 모르고 뱃살처럼 쪄가는 내 가슴을 보며 한탄했다. 엄마는 동생들 키우랴 정신이 없었고 나는 여자로 성장한다는 게 뭔지 알지도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엄마, 나 밑에서 피가 나와.”
자고 일어났는데 팬티에 뭔가 묻어 나왔다. 평소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듣던 엄마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내 손을 이끌고 화장실로 데려갔다. 엄마는 내 피를 확인하고는 아무도 듣는 이 없는 화장실 안에서 누가 듣을세라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너 이제 생리하는 거야. 엄마가 생리대 하는 법 가르쳐줄 테니까 잘 따라 해. 그리고 이건 남사스러운 일이니까 남들한테 말하지도, 티 내지도 마. 특히 남자들한테. 화장실 뒤처리 잘해서 아빠한테 들키지도 말고.”
엄마는 마치 내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무섭고도 단호하게 나를 다그쳤고 나는 남사스러운 일을 벌여 엄마를 또 곤욕스럽게 만들었단 생각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여자의 상징을 수치스럽고 남들에게 숨겨야 하는 것으로 배웠다.
지금이야 초경 선물을 챙겨주고 성교육은 물론 미디어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축복해 주는 분위기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자의 상징을 입 밖으로 내는 게 불경스러운 분위기였다. 게다가 나는 친구들보다 빨리 시작했으니 쉬쉬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내 자연스러운 2차 성징을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커갔다.
자궁이라는 게 왜 내 몸에 박혀 있으며 이 괴이하게 생긴 장기가 왜 내 몸의 변화를 지배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궁을 가진 종족으로 아기를 가지고 낳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하지만 어린 나의 눈으로 봤을 때 배가 남산만한 임신부를 보면 자궁이 저만큼 부풀어진다는 게 혐오스럽다고 느껴졌다. 왜 하필 나는 자궁을 가진 여자로 태어났을까, 왜 쓸데없이 내 자궁의 시계는 남들보다 빠른 걸까. 나는 나 자신을, 정체성을, 자궁을 괴롭히며 독살을 부렸다.
얼마 전 자궁 수술을 받았다. 아랫배 통증으로 병원에 갔더니 초음파를 보는 의사가 놀라며 말했다.
“자궁근종이 너무 커서 장기를 눌러 아팠던 거예요. 선근증도 심해서 아무래도 자궁을 적출해야 할 것 같은데요.”
자궁을 적출한다는 말에 나는 온몸에 피가 다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릴 적 그토록 부정하고 증오하던 장기를 막상 없애버린다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둘째 가질 생각도 없지만 이제 임신도 하지 못하고 생리도 없을 거란 말이 마치 여자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선고처럼 들려왔다. 자궁이 없어진다면 여자로서의 내 본질이 없어질 것만 같았다. 결혼을 앞둔 직장상사가 자궁적출술로 파혼돼 오열했던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유방암으로 유방을 도려낸 고모가 왜 그렇게 하염없이 펑펑 울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부랴부랴 자궁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의사를 수소문해서 진료를 봤다. 다행히 자궁적출까지는 아니고 부분 절제술만 해도 될 것 같다는 말에 나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수술을 앞두고 남편에게 다시는 임신 못하는데 괜찮냐고, 수술해도, 자궁이 없어도 날 사랑할 거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물었더니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자궁이 있든 없든 너는 너라며 웬일로 진지한 말을 내뱉었다. 맞는 말이다. 자궁이 내 존재를 좌우하진 않는다. 자궁이 없어도 나는 나다.
하지만 매일 보는 사람도 막상 없으면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처럼 40년 가까이 있었던 애증의 장기가 한순간에 없어진다면 몸속의 허함과 더불어 마음의 공허함이 클 것 같았다. 그래도 이 기관 덕분에 소중한 내 아이도 만날 수 있었고 남자들이 겪지 못한 여자로서의 삶도 누릴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번 귀찮게만 느껴지던 생리도 이젠 반가울 정도이다.
여자의 인생을 살게해준 자궁의 남은 반쪽이라도 꽃처럼 소중히 다룰 수 있도록 건강관리에 힘써야겠다.
**그동안 수술과 복직으로 브런치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조금씩 다시 글을 쓰려합니다.
한동안 읽지 못했던 작가님들의 글들이 어서 오라고 반겨주는 듯합니다. 저는 작가님들의 글을 읽으러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