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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슬펐수다!

by 은하육수

유튜브 보며 설거지하고 있던 남편이 나에게 불쑥 물었다.


“너 폭속 알아?”

“폭싹 속았수다.”

“어, 어떻게 알아? 너 이거 안 봐서 모를 줄 알았는데.”


모를 리가 없다. 직장이며 엄마들 모임이며 요즘 가면 전부 저 드라마 이야기를 하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친구 말로는 첫 화부터 눈물버튼이라며 항상 티슈를 옆에 두고 봐야 된다고 한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슬프고 감수성 풍부한 것을 좋아했었나 고개가 갸웃거렸지만 어쨌든 남녀노소, 연령불문 모두 좋아하는 걸 보면 대단한 작품인 것 같다.


나와 남편은 이렇게 붐인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한참 유행이 지나고 남들 다 다른 곳으로 눈돌릴 때 그제야 슬쩍 관심을 가지는 뒷북치는 성격이긴 하지만 왠지 우린 한동안 이 드라마를 보지 않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슬픈 것에 열광할 때 우린 한걸음 물러서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 진짜 슬픈 일이 없어서 그런가 봐.”




한창 입사 지원서를 낼 무렵 나의 장점으로 이렇게 썼다.


- 저는 눈치가 빠르고 공감능력이 뛰어납니다. 타인의 작은 행동을 쉽게 캐치할 수 있고 기쁘고 슬플 때 같이 웃고 울어줘 친구들 사이에서 상담자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공감능력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슬픔에 관해선 더더욱 그렇다. 남동생 취업 걱정하는 엄마를 보며, 남자친구에게 차인 친구를 보며, 결혼식장에서 혼주석에 앉은 친정엄마에게 펑펑 울며 인사하던 동기를 보며, TV 속 불우한 소년 소녀 가장을 보며 나는 무덤덤히 바라볼 뿐이었다.


‘저게 뭐가 슬프지?’


언제부터 내 슬픔의 감정이 고장 나 버렸을까. 짐작컨대 내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걸 인정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내 자식 일에 너무 슬프고 벅찬 나머지 다른 사람의 슬픔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자신의 고통만으로도 벅찬데 남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사치죠 – 「율의시선」(김민서) 중에서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슬픔의 산이 깎이고 닳아지면서 점점 땅속으로 파고든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슬픔은 슬픈 것 같지도 않다. 이별도, 사랑도, 모성애도 나의 슬픔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람들은 나보고 냉정하고 슬픔이 메마른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걸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나는 어느새 고민을 토로하며 슬퍼하는 친구에게 조소하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게 뭐 슬픈 거라고. 웃기지 마. 나는 상담가가 아닌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됐다.


준후 선생님이 나에게 ‘그녀에게’란 영화를 봤냐고 물어봤다. 자폐아이를 키우는 엄마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보지 못한 상태여서 안 봤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걸 보며 내가 많이 떠올랐다며 나에게 꼭 보라고 추천하셨다.


“제가 아직 볼 준비가 안돼서요.”


나는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불쑥 꺼냈고 선생님은 머쓱한 듯 자리를 떴다. 우스웠다. 내 아이 이야기는 소설로 썼으면서 정작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들으려 않은 내 모순에 어이가 없었다. 그걸 보면 슬픔에 무뎌졌다기보다는 내 슬픔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 슬픔을 정면으로 부딪히기 두려워서 피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말아톤’ 영화도 몇 번 보려다 겁이 나 포기했다.


어떻게 보면 슬픔의 역치가 올라간 것일 수도 있고 한편으론 내가 슬픔을 마주할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아이 일을 겪으면서 슬픔에 단련되었다고, 바위처럼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나 보다.

나는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처럼 작은 슬픔에도 쉽게 허물어져 버렸다. 그래서 슬픈 일은 슬프지 않다고 외면하고 슬픈 드라마는 보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이다. 내 아이는 내 아이 일이고 영화는 영화라고 구분 지으면 좋겠지만 아직 나는 멀었나 보다.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였지만 아직 저 깊숙한 구석에서는 웅크리고 자책하는 내가 남아있다.


언제쯤 다른 사람의 슬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을까. 언제쯤 남들 다 우는 영화를 자신 있게 보러 갈 수 있을까. 오늘도 슬픔의 감정을 애써 누르며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오열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귀 기울이는 척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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