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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말, 조크든요

by 은하육수

얼마 전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와 같은 경상도 토박이로 20년 이상 살다가 서울로 간 친구였다.


“니 밥 묵었나아?”

“응, 밥 먹었지. 너도 점심 먹었지?”


오랜만에 듣는 친구 목소리에 반가우면서도 뭔가 부자연스러운, 낯선, 어색한, 닭살스런 기운이 느껴졌다. 친구의 말투엔 어릴 적 나와 같이 쓰던 사투리 대신 서울 말씨가 묻어있었다.


벌써 사투리 다 까먹었냐고, 서울사람 다 됐다고 놀림조로 말하자 친구는 멋쩍어하며 말했다.

“서울 산 지 꽤 되니 사투리 다 잊어버렸어. 쓰고 싶어도 못쓰겠다, 얘. 호호.”




서울에 처음 간 건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친구가 서울로, 그것도 대치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우리는 서울 선진 교육 시스템을 탐방한다(?)는 명목하에 부모님의 허락을 겨우 받아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눈 감으면 코 베인다는 서울을 우리는 두 눈이 벌게지도록 깜빡이지 않고 가방을 와락 끌어안고 말 한마디 없이 벌벌 떨며 올라갔다.


서울물 조금 먹은 친구는 여유만만하게 63 빌딩이며(그때는 롯데타워가 없었다) 유명 대학캠퍼스를 구경시켜 줬고 우리는 점차 긴장이 풀리며 신기하다고, 재밌다고 수다를 떨며 지하철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학생들, 조용히 못해? 어디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굴어? 지방에서 온 거 자랑하는 거야, 뭐야..”


우린 평소 데시벨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맞은편 할아버지는 시끄러우셨던 모양이다. 옆자리 대학생 언니들이 더 왁자지껄했지만 할아버지의 귀엔 독특한 억양이 있는 사투리가 더 듣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시끄럽게 한 건 죄송했지만 지방에서 왔다고 깔볼 건 아니지 않나 싶었지만 우린 차마 할아버지에게 말대꾸를 할 수 없었다. 우린 사투리 쓴 게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주눅이 잔뜩 든 채 합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간호사로 취업했다. 잔뜩 기고만장한 상태로 직장에 간 나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서울말에 정신을 못 차렸다. 나긋하고 다정한 서울말들 사이에 힘이 잔뜩 들어간 사투리가 툭 나오면 나는 내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내 말이 마치 잔잔한 들판에 불쑥 튀어나온 모난 돌처럼 느껴졌다.


서울에 왔으니 서울말을 쓰고 싶었다. 지방에 올라온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엄마와 통화할 때도 서울말을 연습했다. 다른 사람에게 화가 나면 경상도에서는 '와 저라노' 하며 소리 지르면 되는데 나는 괜히 "어머, 쟤 어쩜 저럴 수 있니?" 말을 풀어쓰며 서울말투를 따라 했다. 서울사람이 자주 쓰는 '그리구', '맞어' 등을 따라 하며 서울사람인 것처럼 행세했다.


병실 환자가 퇴원하기 전 퇴원 안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내일 병원비 수납하시면 약 받으실 수 있어요. 그리고 외래는 다음 주 월↗요일에 오시면 됩니다.”

설명을 가만히 듣던 환자가 갑자기 풋!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타이밍이 아니었는데 왜 웃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간호사님 여태 서울분이 신줄 알았는데 지방분이신가 보네요. 그죠?”

“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요일 말씀하실 때 월↗요일이라고 ‘월’ 자를 강하게 발음하는 거 보고 알았죠.”

나는 마치 내 치부가 드러난 것처럼 얼굴부터 발끝까지 화끈거렸다. 마치 이 환자에게 내 약점이 잡힌 것처럼 느껴져 나는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왔다.


나는 왜 필사적으로 서울말을 쓰려고 했었을까. 왜 사투리를 그토록 숨기려고 애썼을까. 서울말을 쓰면 서울사람이 될 줄 알았다. 같은 말을 해도 서울말을 쓰는 사람이 왠지 더 있어 보이고 교양이 넘쳐 보였다. 표준어의 정의에 괜히 '사투리 쓰면 교양 없는 사람이 가!'라며 트집 잡았지만 괜히 그 말이 신경 쓰여 더 서울말을 쓰려고 노력했다. 서울에 살고 서울말을 쓰고 서울사람이 되면 나는 세련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살다 보니 서울말을 쓴다고 모두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말투가 차분하고 다정해도 그 말속에 뼈와 칼이 숨어있을 때가 많았다. 서울 토박이 남자친구는 서울말 열심히 쓰는 나에게 ‘그래봤자 서울말 따라 하는 지방사람’인 거 다 티 난다고 핀잔을 줬다. 내 눈에도 사투리를 안 쓰려고 안간힘을 쓰는 내가 우스운데 그들의 눈에는 얼마나 가관일까 싶었다.


다시 돌고 돌아 경상도에 터를 잡은 나는 서울말을 해보라 해도 할 수 없게 됐다. 20대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던 나는 시간이 지나며 서울사람이 된다 해도 내 본질은 바뀔 수 없고 사투리를 쓰는 내가 촌스럽다고 느끼지 않는 그런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

가끔 그들의 부드러운 말투가 부러울 때도 있지만 툭툭 내뱉어도 짧게 함축된 단어에 많은 의미를 내포한 우리 지방 사투리도 마음에 든다.


"주말인데 내일은 뭐 할 거야?"

얘도 나 못지않게 드센 말투였는데 부드럽게 변한 걸 보면 서울말투가 감미롭긴 감미롭다 생각하며 나는 괜히 더 힘주며 말했다.


"일↗요일에 애 데리고 밖에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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