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후 이를 닦아주다가 준후 이마에 갑자기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자기도 차가운 걸 느꼈는지 이마를 만지작거렸고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남편을 급하게 불러 화장실 천장 좀 봐달라고 했더니 위층 배수관과 우리 화장실 사이 공간에 물이 고여있었다. 아마 위층에서 물이 새는 것 같았다.
다음날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시설팀 아저씨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아저씨는 화장실 천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물이 샌 흔적이 안 보인다고 했다. 전날 남편이 급한 대로 사진을 찍고 물을 닦았는데 물이 떨어지다 말다 하는 건지 아저씨가 온 동안은 물이 고여있지 않았다. 시설팀 아저씨는 만약 또 떨어지면 그때 내가 윗집한테 직접 이야기해서 해결하라고 하고는 금방 자리를 떴다. 나는 멀뚱히 서 있다가 그 사실을 남편에게 알렸다.
“그냥 가셨다고? 사진 보여줬어? 다시 새면 우리한테 알아서 해결하라 했단 말이야? 그런 건 시설팀에서 중간에서 말해줘야지 우리가 전문가도 아닌데 그쪽 배관 문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넌 그냥 가만히 있었어?”
며칠 후 다시 물이 새기 시작했고 다시 시설팀을 불렀다. 며칠 전 남편에게 핀잔받은 일도 있고 해서 나는 이번엔 마음 단단히 먹고 아저씨를 맞이했다. 아저씨는 물이 한가득 고여있는 천장을 보고 그제야 심각성을 느꼈는지 나보고 윗집에다 이야기하라고 했다.
“제가 윗집에 바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기사님이 중간에서 이야기해 주시는 게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나는 떨리지만 마음속으로 계속 연습한 말을 아저씨에게 했고 아저씨는 입을 삐죽거리며 윗집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아저씨 폰 너머 아줌마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밑에 집에서 물이 새는데 왜 우리가 그걸 고쳐줘야 돼요?
아저씨와 윗집 아줌마는 옥신각신했고 결국 누수 기술자를 불러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자고 일단락 지었다.
집이 오래되다 보면 고장 나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고 물 새는 일이 어쩌면 시덥잖은 일이지만 문제의 원인을 알아내고 누가 물어줘야 하는지 시시비비를 가리고 나에게 손해가 생기면 상대가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논리와 무대뽀 정신이 필요한, 상당히 피곤하고 골치 아픈 사건이었다.
문득 내가 결혼하기 전 친정에서도 이와 똑같이 화장실에서 물 새는 문제 때문에 곤욕을 치른 일이 떠올랐다. 이사 가자마자 물이 샜고 부모님은 부동산에 바로 항의를 했고 위층 배관 문제로 밝혀져 위층 사람에게 빨리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위층은 알겠다고 해놓고는 수리를 차일피일 미뤘고 우리는 멀쩡한 화장실도 못쓴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할머니가 위층으로 찾아가 따지셨고 위층 아저씨는 할머니와 말싸움을 하다 할머니를 밀치고 경찰이 출동하는 등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물 한 방울 떨어지는 이 사소한 일 때문에 할머니는 다치고 신고하겠다느니 보복하겠다느니 큰소리가 오가며 우리 집과 윗집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부모님의 강력한 요구와 투쟁으로 윗집은 누수공사를 했고 할머니 치료비도 받으며 우리 집은 다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것도 없이 관리사무소며 누수업체에 척척 전화를 하고 철면피인 윗집에다 따다다다 쏘아붙이는 부모님을 보며 나는 나도 저 나이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저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시장이나 옷가게에서 돈을 흥정할 때 그런 엄마가 창피하면서도 왠지 용감하다고 느꼈고 대학에 가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경제나 사회문제에 빠삭한 아빠를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도 어른이 되면 저절로 저렇게 될 거라고 막연히 믿었다. 아는 게 많아지고 연륜이 쌓이고 낯짝이 두꺼워지면 알아서 해결방법을 바로바로 떠올리고 내 권리를 찾아 따질 줄도 알고 큰소리도 낼 줄 아는 어른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이 나이 먹고도 그렇게 할 줄 모른다. 물이 새도 어디에 어떻게 문의를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윗집이 안 고치고 버티면 어쩌나 초조하고 불안에 떨기만 했다. 난 부모님처럼 윗집에 따져 물을 용기도, 패기도 없었다. 그저 아무 소란 없이 문제가 해결되길 어린아이처럼 기도할 뿐이었다.
누수탐지업체에서 왔다 갔고 이게 윗집 배관문제가 아닌 아파트 공용부 문제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빨리 고쳐지지 않았고 관리사무소는 이 내용이 전달이 잘 안 된 건지 어쩐 건지 사람을 바꿔가며 무슨 일이냐고 되묻기만 했다.
“시설팀이나 직원분께서는 이 일에 대해 인계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그럼 제가 소장님과 동대표님께 직접 말씀드릴게요.”
답답한 나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나만 그렇게 느꼈을 수 있다) 말했고 그제야 시설팀에서 부랴부랴 나에게 전화 와서 이번주 내로 고치기로 했다고 알려줬다. 전화를 끊은 후 내 등이며 겨드랑이엔 땀이 흥건했다. 어른인 척, 다 아는 척, 센 척하다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걸, 따지지도 못하는 사람인 걸 들통날까 봐 긴장을 많이 한 탓이었다.
어릴 때 어른이 된다는 건 그저 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고 가정을 꾸리고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안 대소사를 처리하고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 매진하고 사소한 다툼이라도 내 권리를 뺏는 사람에게 큰소리칠 줄도 알아야 그게 정말 어른이 되는 거였다.
몸뚱이만 어른이지 속은 어른도 아닌 내가 어른행세를 한다는 게 우습고 겁나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조금씩 노력한다면 나도 부모님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