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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Chae Jan 26. 2021

Back to the 2015, Castles

이름 모를 성을 찾아 떠난 모험

이번 여행 계획이 구체적으로 잡히기 훨씬 전에 막연히 영국, 베를린, 독일을 여행하고 싶다고 주변 사람 몇 명에게만 말해 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친언니가 SNS 어떤 게시물에 나를 태그 했다. 그 게시물은 유럽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 위의 성’들의 사진을 모아 놓은 것이었다. 그 게시물을 보자마자 일단 이름을 검색해 지도에 표시했고 대충 여행의 윤곽이 잡힐 때쯤 이동 동선에서 거리가 가까운 몇 곳을 정해서 모험을 떠나기로 했다. 찾아갈 수 있으면 정말 좋고 아니면 아쉽지만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은 비운 채로.

이미지 출처 : 구글맵 (문제 시 알려주세요)


Schloss Nordkirchen

Burg Virschering


앞으로 벌어질 이날의 모든 사건은 이 네 단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정보도 많지 않았고 심지어 구글 맵(google map) 길 찾기도 가끔은 정확하지 않을 때가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행 준비를 할 때도 이 성들은 도르트문트(Dortmund)라는 도시에서 찾아가야 한다는 정도만 겨우 알아낸 상태로 이번 여행이 시작되었다. 운전을 해서 간다면 오히려 편할 것 같았으나 당시 나는 10년 장롱 면허 소지자였고 여행 예산도 넉넉하지 않아 차를 빌려서 운전을 한다는 것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과연 대중교통으로 거기까지 찾아갈 수 있을까 막막했지만 그 지역에 사는 현지인들은 잘 알고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일정표에 찾아갈 곳의 이름만 달랑 적어서 출발했다.


벨기에와 독일은 유레일 패스가 있으면 이런 교통 천국이 따로 없다! 예약도 필요 없고 (좌석 확보를 위해 장거리 이동은 미리 예약하기도 한다) 기차 시간만 확인해서 올바른(!) 기차에 타고 올바른(!) 역에서 내리기만 하면 된다. (근데 그게 의외로 어렵다는 게 함정) 쾰른에서 도르트문트는 기차로 30분 거리이고 주요 거점 중 하나여서 지나치지 않고 잘 내릴 수 있었다.


도르트문트 중앙역 안내 데스크로 가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오늘 나를 살린 소중한 종이 한 장

‘나 여기 가고 싶어요.’ 또는 ‘나는 이곳을 찾고 있어요.’ 아니면 ‘이곳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씩 웃는다.


그러면 직원은 웃지도, 당황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자판을 두드리며 이것저것 찾아본 후에 이런 답장을 돌려준다.

목적지까지 가는 교통편이 적힌 출력물

다짜고짜 성 이름 하나 적힌 종이를 내밀며 여기 가고 싶으니 방법을 알려 달라고 요구하는 검은 눈동자의 작은 여자를 신기하게 보면서, 그러나 무표정하게, 하지만 참 친절하게 환승역, 갈아타는 버스정류장, 버스까지 하나씩 짚어가며 알려준다. 무뚝뚝하다고 친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Capelle bahnhof에 내렸는데 사무실도 없고 역무원도 보이지 않는 작은 역이었다.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늘 그랬듯이 일단 느낌대로 가보자.

기차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중간 경유지 Capelle

역 밖에 15인승쯤 되어 보이는 앙증맞은 버스가 정류장에 서있다. 귀여운 뒷모습은 버스에 올라타라는 뜻이겠지?

귀여운 규모의 마을버스

냉큼 버스에 올라서 기사 아저씨에게 똑같이 종이를 내밀며 영어로 물었는데 이 아저씨 영어를 못하신다. 이제까지는 주로 대도시 관광지 위주로 돌아다니면서 그때 만난 사람들과는 모두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었기 때문에 독일 사람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영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지 않은가. 여행지에서는 어떠한 선입견도 조심하자.


말이 안 통하면 손짓 발짓으로 하면 되지! 말투도 표정도 한없이 단호한 기사 아저씨께 다시 한번 그 종이를 들이밀었다. ‘Schloss Nordkirchen’

이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이제서 알게 되었으니 나는 이날 얼마나 무모했는지. 기사 아저씨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맨 앞자리에 앉으신 할머니도 거기 가는 버스 맞다고, 내릴 곳을 알려주겠다고 독일어로 말씀하셨다. 말은 못 알아들어도 표정과 몸짓을 보고 대충 눈치채는 센스! 그럼 믿고 탑니다!


정류장도 잘 찾아왔고 버스도 맞게 탔으니 이제 교통비를 알맞게 지불하기만 하면 이번 첫 모험의 시작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당당하게 수중에 있던 동전을 모두 꺼내 보여주었다. 이 행동을 언어로 바꾸자면 ‘버스비는 얼마입니까?’ 혹은 ‘얼마면 돼?’ 정도랄까. 그런데 이 아저씨가 금액은 안 알려주고 계속 독일어로 말씀하신다.


여행지에서 다른 의사소통은 어렵더라도 음식이든 물건이든 버스비든 값을 지불하는 건 쉽다. 숫자야말로 만국 공통이라 돈을 받는 사람은 가격표나 영수증을 보여주고 돈을 내는 사람은 그에 맞게 내어 놓으면 되니까. 근데 이 아저씨가 영수증은 안 끊어주고 말만 하니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지. 유럽에서는 주로 내릴 때, 타고 온 거리만큼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때가 되면 금액을 알려주겠지 하고 얌전히 버스에 앉아있었다.


잔뜩 긴장해서 눈치를 보며 30분 정도 달렸을까? 버스에 탄 모두가 나에게 내리라는 신호를 보낸다. 문이 열린 버스 앞에 어정쩡하게 서서 기사 아저씨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이 행동은 해석하면 ‘그래서 버스비가 얼마요, 기사양반?’ 요금을 얼마나 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는 내게 아저씨는 쿨한 표정으로 그냥 빨리 내리라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신기했나? 불쌍해 보였나? 이런 작은 마을에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건가?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얼떨떨하게 버스에서 내렸는데 나중에 하노버에서 만난 선배는 독일에서 그런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신기하다고 했다. 이때 공짜로 얻어 탄 버스 사건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버스의 모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는 잘 가꿔진 숲이 있었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길을 걷다 보니 반듯한 궁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드디어 찾았다.

곧게 뻗은 숲길을 지나, 호수 너머, 드디어 도착


성과 주변을 산책하면서 둘러보니 이곳에서 혼자인 사람은 나뿐이다. 자유롭기도 하고 외롭기도 한 복잡한 감정이 든다.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혼자이고 싶어 하면서, 혼자 있으면 또 누군가와 함께하기를 꿈꾼다. 온전히 혼자이고 싶어서 떠나왔는데 이렇게 혼자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에는 함께 할 누군가가 간절해진다. 그리고 내가 결국 혼자라는 것을 인정하기 힘든 만큼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나는 다시 혼자 떠나겠지


반듯하게 정돈된 모습이 독일스럽다고 해야 할까
대저택과 정원, 넓다
얼굴은 차마 못 올리겠네요



고즈넉한 성을 둘러보며 사색도 충분히 했으니 이제 다시 촉각을 곤두세우고 다음 목적지로 향해야 할 때이다. 이곳 안내소에 들어가 또다시 쪽지를 내밀었다.


이번엔 'Vischering castle, Ludinghausen'


단 세 단어가 적힌 쪽지를 들이밀었을 뿐인데 독일어를 모르는 나에게 버스정류장 철자를 잘 보이게 적어주고 이 지역 전체 지도와 성 주변 지도를 펼쳐서 정류장 위치와 찾아갈 목적지를 잘 알아보게 표시해주는 친절을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런 친절이라니!



알려준 대로 버스에서 내렸다. 근데 여긴 어디? 이곳이 아기자기하고 한산하고 예쁜 마을인 건 알겠는데 비는 부슬부슬 오고 성은 찾아가야겠고 버스와 기차가 끊기기 전에 쾰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하다. 이럴 땐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우체국에 들어가려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다시 한번 쪽지를 내밀었다. (이쯤 되면 쪽지가 거의 마법의 지팡이 수준이다) 다행히 아주머니 영어 수준이 나와 딱 비슷하다. 거의 영어 단어의 나열인 대화를 통해 성을 찾아가는 길을 듣고 다시 모험을 이어 갔다. 가는 길이 다소 복잡했지만 일단 방향을 알았으니 가다가 또 물어보면 되겠지?

내가 지금 대체 어디와 있는 거죠?

그렇게 얼마쯤 가고 있었을까, 차 한 대가 내 옆에 선다. 아까 우체국에서 길을 알려준 아주머니다. 우체국에서 일을 마치고 나왔는데 아무래도 내가 걱정되셨는지 성 앞까지 태워주겠다며 오늘 처음 본 낯선 여행자에게 기꺼이 조수석을 내어 주셨다. 애써 씩씩한 척 다니고 있지만 혼자 외진 곳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느라 초조하고 불안했는데 이런 도움을 받다니! 고마움에 울컥한다.


뜻밖의 호의, 여행지에서 가장 큰 선물


뜻밖의 호의로 편하게 도착한 이곳
투박하지만 섬세한 성의 안과 밖
어느새 날씨는 화창해지고 물에 비친 모습까지 완벽하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정말 우연히 또 다른 예쁜 대저택을 만날 수 있었다. 역시 무모한 모험을 감행한 보람이 있었다.

이 길은 또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
갑자기 나타난 샛길이 이곳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가끔은 잘 짜인 일정과 동선에서 벗어나 무작정 헤매는 것도 해 볼만 하다.

뜻밖의 선물을 만나게 될지도.


나 혼자만 흥미진진했던 오늘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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