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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Chae Jan 27. 2021

Back to the 2015, Zollverein

과거, 현재, 미래가 만나는 곳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Nordrein-Westfalen)에는 에센(Essen), 도르트문트(Dortmund), 뒤셀도르프(Dusseldorf)를 중심으로 하는 루르(Ruhr) 공업지역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관광지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는 학부 시절에 책으로, 수업 자료로, 사례 발표로 수없이 듣고 보면서 언젠가는 직접 가서 내 두 눈으로 그곳을 보리라 다짐했었고 이번에 여행 계획을 세울 때 가장 먼저 일정에 넣은 곳이다.


루르 지역은 행정구역 이름이 아닌 주변 공업 도시들을 묶은 거대한 지역을 이른다. 풍부한 석탄 매장량에, 서쪽에는 라인강을 끼고 있어 한때 유럽 최대 공업지역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끈 대표적인 지역이다. 석탄산업이 최대 호황기를 누리던 1970년대 말에는 졸퍼라인(Zollverein)을 포함한 루르 지역이 하나의 거대한 중공업의 중심지였으나 1980년대 이후 석탄과 철강업 분야가 사양 산업이 되면서 함께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졸퍼라인 역시 1986년에 탄광 문을 닫고 일반인들의 접근이 금지되어 죽은 땅으로 남았다.


그렇게 폐허로 방치된 지 10여 년이 지나, 독일의 유명 미술가가 이 탄광지역 한쪽에 조각공원을 조성하려 전시회를 열었고 이후 이 지역을 한 개발회사가 사들여 기존 시설을 철거하고 새롭게 개발하려 한다는 계획을 접한 독일 주정부가 산업지역을 보존하는 정책을 세워 추진하게 되었다. 주정부는 주변의 여러 도시와의 공동출자를 통해 주변 강 유역의 파괴된 환경을 복구하고 폐허가 된 산업시설과 도시 환경을 재생시키는 프로젝트를 10여 년 동안 꾸준히 운영했고 보다 적극적인 보존과 지역 재활성화를 위해 졸퍼라인 재단을 설립해 탄광지역의 산업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결국 2001년 대부분의 탄광시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게다가 단순히 기존 공장 건물과 시설물들을 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박물관, 극장, 디자인 학교 및 예술가들의 작업실, 사무실, 식당과 레저 시설을 도입해 거대한 복합 문화 단지로 조성하여 죽어 있던 곳을 다시 살려낸 것이 이 지역 재생 계획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엄청난 곳에 내가 가게 되다니!


기대감 가득 에센 중앙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째서 저 멀고 작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대학에서 배울 정도로 유명한 곳을 중앙역 안내소 직원이 모를 수가 있냐고? 역에 내리면 아주 쉽게 찾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도 모험인 건가.

오늘도 지도를 보며 모험을 준비한다, 근데 목적지가 지도 밖이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볼 수밖에. 오늘의 목적지인 졸퍼라인 탄광 산업단지(Zollverein)를 가려면 중앙역에서 109번 트램을 타면 된다는데 이 트램 어째 30분이 지나도 오질 않는다.

하염없이 109번 트램을 기다리며

다행히 여행하면서 눈치는 좀 늘었는지 (언어는 안 늘고) 플랫폼 전광판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친절한 영어 안내도 없이 전광판에는 독일어만 흘러가고 있었지만 109번 노선이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까부터 한참을 옆에 앉아있던 독일 부부가 어쩐지 나와 목적지가 같을 듯하여 넌지시 말을 걸었다. '저기요, 109번 트램이 안 와요. 뭔가 이상해요!' 그러자 어느 정도 영어를 하시는 아주머니가 당신들도 거기에 가는 길인데 여기서 109번을 기다려서 타면 된다고 천천히 설명을 해주신다. 하지만 내가 울상을 지으며 전광판을 가리키자 그제야 함께 당황을 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잠시 109번 노선 운행이 중단되어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네 덕분에 알게 되었다며, 하마터면 여기서 하루 종일 오지 않는 트램을 기다릴 뻔했다며 나에게 엄지 척! 을 해 주셨고 우리는 졸퍼라인 탄광 지역까지 함께 가게 되었다. 저도 두 분 아니었으면 플랫폼에서 하루 날릴 뻔했어요, 감사합니다.


나의 최종 목적지는 레드닷 디자인 박물관이었지만 루르 박물관(Ruhr Museum)을 건너뛸 수는 없다. 사실 안에 담긴 내용보다는 보존된 건물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가 정말 궁금했다.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다며 동행을 제안한 부부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혼자 박물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졸퍼라인 탄광 지역의 메인 건물이자 이 지역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담은 박물관은 45m 높이의 공장 건물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기존의 구조물을 활용하고 있었다.

우와! 여기 뭐야?
녹슨 구조물에 조명이 닿아 자연스럽게 나타난 붉은빛이 이곳의 메인 색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담은 Ruhr museum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이 분위기!


건물 안내는 모형으로, 층 안내는 높이로 되어있다
꼭대기에 올라가서 파노라마를 감상
졸퍼라인 단지를 안내하는 모형, 뭔가 귀엽다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을 소개합니다



조금 더 추억 팔이를 해보자면, 아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설계 분야가 좋아서 캐드(CAD, 건축 분야에서 주로 사용하는 설계 프로그램)와 스케치업(당시 2D 도면을 3D로 렌더링 해주는 프로그램)을 만지작거리고 밤새 모형을 만들던 학부 시절. 당시 '보행자의 권리'나 '보행환경'이 강조되면서 사람의 눈높이에 보이는 시설물이나 보행자 시야에 들어오는 간판, 파사드 디자인이 주목받기 시작할 때였다. 맨날 보는 게 그래서 였는지 공공 공간을 채우는 public furniture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꿈을 잠깐 가졌었는데, 아무튼 그래서 내가 학부 당시 산업디자인 분야에 잠시 기웃거렸고 그 덕에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라는 세계적인 디자인 공모전과 그 수상작을 전시하는 이곳 레드닷 디자인 박물관(Reddot design museum)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세계에서 잘 알려진 디자인 공모전 중 하나

박물관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려고 하는데 직원이 나에게 묻는다.

- 얼마 낼 거야?

- 응? 잘 못 들었습니다만? 그걸 왜 저에게 물어보시죠?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직원이 설명해주는 것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특별한 주간이라 기부 형식으로 내가 원하는 만큼 내고 들어가면 된단다. 이곳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났는데 자꾸 기분이 좋아진다.


세상의 모든 디자인, Reddot design museum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는 크게 제품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컨셉 디자인 세 분야로 나뉘고 수상작들은 독일과 싱가포르에 있는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에 전시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동시대 현대 디자인 분야의 훌륭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건축물도 전시물도 너무 재밌어!

이곳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거의 모든 제품을 자유롭게 만지고 사용해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박물관과는 달리 대부분의 전시에서 제품에 직접 다가가고 만질 수 있는 체험을 제공하여 수상작에 관해 다양한 감각으로 경험을 할 수 있게 장려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반가운 한국 수상작들과 나의 인생시계인 '브래들리 타임피스'도 만났다

박물관을 샅샅이 음미하며 살펴보고 밖으로 나왔다. 단지 기분이 좋다고 표현하기는 부족하다. 붕 떠있는 느낌이랄까.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 왔고 실제로 일어날 거라는 생각을 전혀 안 했던 일이 일어나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는 느낌이다. 유럽 여행을 결심하고, 이곳을 일정에 넣고, 주변의 걱정을 뒤로하고 대책 없이 저질러 버린 내가 기특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최대한 구석까지 곳곳을 다니며 이 지역을 충분히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예쁜 정육면체로 지어진 디자인 학교 건물, 수송관 위로 조성된 보행 통로까지.

Zollverein School
그대로 드러나는 구조물들, 아름답다
다시 사람이 모여서 일하고 먹고 마시는 곳이 되기까지


나는 이곳에서 과거 – 현재 – 미래가 진정으로 이어져 있는 모습을 목격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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