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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Chae Jan 28. 2021

Back to the 2015, Hannover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독일 하노버(Hannover), 여행 책자에는 함부르크(Hamburg) 근교의 작은 도시 정도로 나와있었지만 나에게는 어떤 도시보다 특별하고 기대되는 곳이었다. 학부 선배가 살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의 메인을 독일로 정한 후 가장 먼저 선배에게 소식을 알렸고 (현지인만 알 수 있는 고급 정보를 얻기 위해) 언니는 이왕이면 하노버 본인의 집에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무는 건 어떻냐고 예상치도 못한 고마운 제안을 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이번 여정 가운데 가장 긴장감 없는 이틀을 이곳 하노버에서 보낼 수 있었다.


쾰른에서 하노버로 가는 기차가 20분 정도 연착했다. 숙소 밖에서는 와이파이 원시인이었던 나는 선배에게 이 상황을 알리지도 못하고 역에서 서로 엇갈려 만나지 못할까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선배가 하노버 역 승강장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는 이 지역 주민답게 교통 정기권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버스, 지하철, 트램 등 모든 대중교통수단에 대해 무려 ‘동반 1인까지’ 사용 가능하다고 한다. 선배 덕에 숙박비에, 교통비까지 아꼈다.

만나자마자 선배가 데려간 노천카페, 햇빛이 좋아 다들 일광욕 중


지은 지 100여 년 밖에(?) 되지 않은 신시청사(Neues Rathaus, New town hall)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이게 호수인지 강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마슈 호수(Maschsee)가 등장한다. 나치 집권 당시 1930년대 독일판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대규모 토목 공사들이 벌어졌는데 그때 만들어진 인공 호수라고 한다. 주변에 박물관, 미술관과 HDI Arena(하노버 96 구단의 홈구장)도 위치해 있어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포함하여 시민들의 여가를 책임지고 있다.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이야 다소 암울하지만.

시간에 따라 달라 보이는 신시청사


여긴 또 왜 하필 축제 기간?!


아무튼 그 호수에서 마침 지역 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해서 함께 호수로 향했다. 끝을 알 수 없는 호수, 베를린에서 왔다는 밴드의 공연을 즐기며 독일에 왔으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커리부어스트(currywurst, 곁들이는 양념에 커리가 들어가는 구운 소시지)까지. 어디를 찾아가야 하고, 어디를 봐야 하고, 모처럼 이런 의무감을 내려놓고 그저 호수 너머로 석양이 지는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노을을 배경으로 공연도 보고
커리부어스트, 케밥, 맥주가 빠질 수 없지

음악에 몸을 맡기고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던 와중에 선배의 회사 동료에게서 다른 축제로 넘어와서 같이 놀자는 연락이 왔다. 사실 다른 동네에서 열리고 있던 그 축제는 선배가 잘 모르는 곳이기도 내가 혼자 뻘쭘할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었지만 나야 하노버에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여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합류하자는 동료와의 연락을 마지막으로 선배의 폰 배터리가 떨어졌다. 이건 또 무슨 시트콤 같은 일이란 말입니까? 내 폰은 데이터 먹통이라 있으나마나, 선배 집에 들러 잠깐이라도 충전을 하고 가자니 귀찮아서 다시 나오지 않을 것 같고 해서 일단 무작정 동료들과 약속한 곳으로 가기로 했다. 동네 축제가 크면 얼마나 크겠어, 가서 일행을 찾으면 되겠지 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동네 축제가 엄청 크다!

도착 직후에는 여기저기 선배의 동료들을 찾아볼까 하다가 에잇, 못 만나면 좀 어때? 선배와 둘이 그냥 즐기기로 했다. 어김없이 한 손에는 맥주잔, 다른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흥겹게 하노버에서의 락 페스티벌을 만끽했다.

지역 축제 규모가 예상보다 크다?!!



여행 중에도 주말은 주말답게


이제까지 다른 도시에서는 언제나 여행자답게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었지만 오늘은 일요일이고, 여기는 선배네 집이고, 어제는 예상밖에 늦게까지 축제를 즐겼으므로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맛있는 브런치를 차려 먹기로 했다. 오늘의 브런치를 위해 어제 마감 직전의 마트에서 장을 봐 두었고 선배는 아침 일찍 빵을 사 오는 수고를 해 주셨다. 기본 빵과 훈제 연어, 각종 치즈들과 카프레제 샐러드까지. 한국에서도 손쉽게 재료를 구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었지만 유난히 맛있게 느껴지는 건 역시 내 기분 탓이겠지?

재료는 특별하지 않지만 맛은 특별했던 브런치
이 집에는 냥이 두 마리가 살고 있어요



주말이라서 선배는 가족들과 선약이 있었고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극구 말렸지만 결국 나가는 길에 나를 또 어딘 가에 데려다주었다. 덕분에 교통비와 숙소비를 아끼고 만난 이후로 아이스크림이며 맥주까지 모든 것을 다 사주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마운데 선배는 선약이 있어 나가면서도 나를 혼자 두게 되어 미안해했다. 이미 충분히 많이 받았어요, 고맙습니다.


선배가 가는 길에 떨궈준 곳은 하노버에서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 헤렌호이저 왕궁 정원(Herrenhauser Garten)이었다. 유럽의 많은 궁전이 그러하듯 정원이 건물보다 훨씬 넓고 화려하다. 화사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여행 책자 단 몇 페이지에 간략히 소개되어 있는 하노버 관광 정보 중에 이 곳이 있었다. 사실 처음에 궁전 입구에서 티켓을 끊을 때만 해도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규모와 인공적인 조경. 워낙 넓어서 다양한 양식의 조경 스타일이 혼재해 있었다.

드넓은 정원을 탐험해보자
하늘은 또 마침 화창하고
정원 곳곳 조화롭다
친구와 가족들과 평화로운 한 때
날씨가 좋아 의미 없는 사진과 동영상을 쉴 새 없이 찍어댔다



나는 왕궁 정원을 보고 선배는 가족 모임을 마치고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오늘도 와이파이 원시인인 나를 위해 접선 장소를 시청으로 정했다. 햇빛은 강했지만 바람도 시원하게 불고 습하지 않아서 걷기 좋은 날씨. 다소 멀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거리를 나는 또 걷기로 했다.

걷는 길에 마주친 대학 캠퍼스



선배가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해서 함께 올라가기로 했던 시청사 꼭대기에 혼자 올랐다. 시청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번 올라간 후 다시 밖으로 나가 돔에 오르는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는데 예상외로 줄이 길었다. 줄 맨 끝에 서서 멍하니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잠시 당황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 있던 아주머니가 나에게 혼자 왔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앞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라고 했다. 알고 보니 엘리베이터는 탑승 인원 제한이 있는데 한 자리가 남아 혼자 온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운 좋게 오래 기다리지 않고 올라갈 수 있었다.

높은 곳에 오르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인가

시청 로비에는 하노버 시내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각 시대별로 그 당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시의 모형이었다. 전범국이라는 오명도, 폐허가 되었던 도시도 엄연한 역사이니 감추거나 미화하지 않고 잘못된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오히려 철저하게 가르치고 배우는 독일인들의 정신이 느껴지는 듯했다.

폐허가 된 모습도 모형으로 남겨두는 역사관이라니

가족 모임이 길어지는지 선배는 통 올 생각을 않고 그동안 시청 꼭대기에 올라 천천히 주변도 다 둘러보았으니 이제 건물 1층에 있는 식당으로 가자. 맥주나 한 잔 하면서 일요일 오후를 만끽해볼까? 식당 안에서 선배를 기다리다가 그러기엔 이 화창한 날씨가 아까워서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날씨까지도 즐기는 것이 진정한 여행일 테니



몇 시간 만에 재회한 선배는 오늘 하루 나를 혼자 두어 미안하다며 저녁을 제대로 사겠다고 했다. 이제까지 얻어먹은 걸로 치자면 내가 사도 모자란데.

독일에서는 역시 독일스러운(?) 음식을 먹어야 한다며 데려간 곳은 슈니첼이 유명한 식당이었다. 슈니첼이나 학센은 사실 뮌헨을 중심으로 하는 바이에른 지역에서 온 음식이고 북부 독일 사람들은 바이에른을 독일의 일부 지역이 아닌 다른 나라쯤으로 생각한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한반도라는 국토를 기준으로 국가의 정체성과 일체감을 느끼는 우리와는 역시 참 많이 다르다. 그래서 결국 북부 독일인들은 바이에른 음식을 '독일 전통' 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에게 '독일 음식'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역시 슈니첼과 학센이라 외국 거래처 사람들이 출장에 오면 꼭 이런(?) 음식을 대접한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와 함께 하노버의 마지막 날이 지나간다.

거대한 슈니첼과 샐러드



독일 하노버. 돌이켜보면 여행책에는 함부르크의 근교 도시 정도로 소개되어 있는 이곳이 나는 정말 좋았다. 나를 반겨주는 이가 있어서였을까, 모처럼 긴장하지 않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서였을까. 영어도 독일어도 못하는 관광객으로, 어느 도시든 겉모습만 스치듯 보고 지나가는 느낌이라 아쉬웠는데 이곳 하노버에서는 이틀 내내 마치 내가 이 도시에 속해 있는 사람인 듯 지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선배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며. 하노버를 떠나 다음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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