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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Chae Feb 03. 2021

Back to the 2015, Berlin 2

걸어서 베를린 속으로

아무리 대도시라고 해도 유럽의 도시들은 그 규모가 작다. 복잡하고 바쁘고 밀도가 높아도 ‘서울’에 비하면 여러모로 작다. 그래서 독일 최대 규모라는 이 도시를 얕잡아본 나는 오늘도 뚜벅이를 자처했다. 마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병이라도 날 것처럼, 대체 이건 무슨 오기인가?


베를린 중앙역 바로 앞에 있는 공원(Spreebogen Park)을 시작으로 국회의사당(Reichstagsgebaude)을 지나 브란덴부르크 문을 다시 만났다.

가볍게 산책으로 시작하는 하루


 

여기서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홀로코스터 기념 공원(The Holocaust Memorial -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이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나조차도 모를 수가 없는 제2차 세계대전과 당시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 그때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물이 설치된 곳이다. 베를린에 기념공원이 있다는 것 외에 공원에 대해 자세한 건 몰랐고 심지어 사진을 찾아볼 생각도 안 했기에 이런 조형물이 있는 것도 이곳에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민망하지만, 전혀 모르고 간 덕분에 조형물을 마주했을 때 강하게 압도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공원을 멀리서 바라보면 돌로 만들어진 육면체가 마치 거대한 의자들처럼 죽 늘어서 있는데 막상 그 가운데로 들어가서 보면 그 육면체가 마치 묘비 같이 보이기도 하고 내가 깊고 좁은 구덩이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멀리서 봤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의 내부

습하지 않아 끈적한 느낌이 없는 날씨지만 그래도 한여름이라 낮에 함부로 걸어 다니다가는 일사병 걸리겠다 싶은 날씨에도 이 안은 이상하게 서늘했다. 기분 탓인가, 천천히 걸었다. 역사를 알아서 그런 걸까, 오싹한 느낌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내부의 실상은 얼마나 다른가,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표면에 비해 절망은 얼마나 깊은지 감히 짐작할 수 있는가. 직접적인 메시지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왠지 섬뜩한 느낌과 함께 생각이 많아지는 곳이었다.



밥을 먹기에 썩 즐거운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먹을 건 또 잘 먹어줘야 하니 아침을 먹으러 가보자. 진정한 케밥은 터키가 아니라 독일에 있다는 독일 주민의 추천에 따라 베를린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케밥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눈 앞에 나타난 베를린 문화지구(Kulturforum). 생각도 기대도 못했는데 서울로 치면 '예술의 전당'과 비슷한 곳이었다. 라이브 한 번 듣기가 평생의 소망인 '베를린 필하모니'의 산실이자 악기 박물관과 현대미술관 등 복합 문화 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언젠가 이곳에서 연주를 들으리라



이곳저곳 둘러보며 걸었는데도 케밥집(Mustafa’s Gemuse Kebap) 오픈 15분 전에 도착했다. 유명한 집이라고 해서 건물에 있는 번듯한(?) 식당인 줄 알았더니 가판 매장이었다. 그래도 오픈을 기다리는 줄만큼은 번듯한 맛집. 기다리는 줄에 동양인은 의외로 나 하나였다. 채소, 소스, 치즈 모두 듬뿍듬뿍 넣었다. 길거리 음식이라고 가벼이 보지 마시길. 양도 양이지만 맛이 진짜 예술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이 맛이 계속 생각나서 나중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케밥을 먹으러 베를린에 다녀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관광객, 현지인 할 것 없이 줄 서서 먹는 케밥


여기 케밥을 먹지 않은 자,

케밥을 안다고 말하지 말라.



어째서인지 매표소 앞까지 갔다가 차마 들어가지 못했던 유대인 박물관(Jewish Museum). 홀로코스터 기념공원에서 느꼈던 서늘함 때문이었는지 관람을 하면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충격이 클 것 같았다. 막연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1933년 설립되었으나 나치에 의해 1938년에 폐쇄되었다가 공모전을 통해 2001년에 다시 이 모습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서울 삼성역 코엑스 맞은편에 있는 아이파크 타워를 건축한 폴란드계 유대인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의 작품이다. 다음에 베를린에 가면 용기 내서 꼭 들어가 봐야겠다. 이렇게 베를린에 다시 가야 할 이유를 또 하나 남겨두고.

왠지 들어갈 수가 없었던 유대인 박물관



유서가 깊은 도시답게 발 닿는 대로 걸었는데 여기도 유적, 저기도 명소다. 어느새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에 와 있다. 미국 연합군과 나치 독일 사이의 군사 경계였던 곳. 한반도의 군사분계선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곳도 언젠간 지나간 역사의 한 순간으로 기록될 수 있겠지. 나도 모르게 간절한 기원을 하게 된다.

이념의 대립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5개의 박물관(베를린 신, 구 박물관, 국립미술관, 보데 박물관, 페르가몬 박물관)과 베를린 대성당, 베를린 궁전 등이 모여 있는 슈프레 강 위의 섬을 박물관 섬(Museum Island)이라고 부른다. 섬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거대한 교회와 박물관들

사실 유럽여행 몇 번에 걸쳐 박물관, 미술관 지겹도록 다닌 터라 오늘만큼은 억지로 소화시키지도 못할 음식을 꾸역꾸역 먹는 것처럼 전시품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굳이 박물관 섬에서 시간을 보낸 건 이곳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섬 전체에 잔디밭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었고 그 위에 어른, 아이, 가족, 친구, 연인들이 또는 나처럼 혼자인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거나 누워서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음악을 듣거나 아이와 함께 웃으며 여유를 즐기는 그들을 보며 어쩐지 나도 그 분위기의 일부가 된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나도 잔디에 앉아 한껏 여유를 즐겨본다



내 것이 아닌, 그들의 여유와 웃음을 빌려 한껏 분위기에 취해 있다가 배가 고파 정신을 차렸다. 배도 채우고 눈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하케셔 마르크트(Hackescher Markt)로 향했다. 기존에 마켓이 열리던 광장은 현재 주변 레스토랑의 야외 테이블이 깔린 깔끔한 모습으로 바뀌었고 광장 옆쪽으로 다양한 가게, 카페와 식당이 모여 있는 건물이 있다.

이 신나는 분위기는 또 뭐지?

건물 중정 안으로 한 발 들어가자마자 바깥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편집샵, 디자인샵, 의류샵 등 색감 좋은 아이템이 있는 가게들은 웬만한 미술관만큼이나 흥미롭다.

여행 경비 탕진하는 이런 요물들

알고 간 건 아니었는데 건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들어가게 된 오토 바이트 박물관(Museum Blindenwerkstatt Otto Weidt)안네 프랑크 박물관(Anne Frank Zentrum)도 한 번쯤 둘러볼 만하다.

오토 바이트 박물관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시각 장애, 청각 장애를 가진 유대인을 고용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비밀의 방을 만들어 숨겨 주어 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구한 오토 바이트라는 인물과 그 당시 공장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낯선 이름의 작은 박물관에서 결코 작지 않은 역사의 한 순간을 만났다.

작고 조용한 박물관

안네 프랑크 박물관은 어릴 때부터 연령대별로 다양한 버전의 ‘안네의 일기’를 접해와서 그런지 친숙하고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 내용은 쓸쓸하고 안타깝지만 따뜻한 조명이 기분을 너무 가라앉지 않게 배려해주었다.

웃고 있는 안네가 보이는 곳이 박물관 입구



드디어 배를 채운다. 남은 여행 일정을 무사히 마치려면 잘 자고 잘 먹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미 맥주 맛집으로 유명한 Brauhaus Lemke 식당으로 갔다. 바삭하고 짭짤한 학센과 맥주의 조화는 이미 검증되었으니 메뉴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바이젠과 듄켈을 한 잔씩 마시며 이제까지 지나온 곳과 앞으로 남은 도시들을 떠올려본다.

도시의 마무리는 맛있는 음식과 맥주로


이토록 좋은 음식과 맥주로 베를린을 마무리해 본다.


이토록 좋은 도시,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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