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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Chae Feb 08. 2021

Back to the 2015, Heidelberg

청년같이 푸르른 오래된 도시

오래된 중세의 도시로 독일(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의 소재지로도 유명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 다녀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고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군이 이곳을 점령해 2011년까지 주독 미군의 거점 중 하나였던 탓에 미국 방문자들이 늘면서 주요 관광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138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가 설립된 이후 독일 학문의 중심지로 현재까지 많은 학생들과 관광객들로 활기찬 도시이다. 중세시대부터 도시를 지키고 있는 성과 대학교라 듣기만 해도 흥미롭지 않은가?



기차역에서 내려서 하이델베르크 성(Das Heidelberger Schloss)을 향해 출발했다. 성이 산 중턱에 있기 때문에 성을 먼저 보고 아래로 내려와서 도시를 둘러보는 게 좋을 거라는 안내에 따라서 하이델베르크 성을 첫 목적지로 삼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산 중턱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는 건 몰랐던 덕분에 본의 아니게 아침부터 등산이 시작되었다. 걷는 거 좋아해서 유난스럽게 일부러 걸어서 올라간 게 결코 아니었다. 나중에 케이블카의 존재를 알고 얼마나 아쉬웠는지.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낯선 곳을 걷는다

케이블카의 존재를 ‘몰라서’든, ‘알지만 굳이’든 성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관광객들도 꽤 있다고 하던데 내가 성을 향해 등반한 길은 동네 주민도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나 보다. 아무도 없는 가파른 동네 산 길을 상쾌하게 오르고 또 올랐다. 이렇게 사서 고생한 덕에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못 보는 하이델베르크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그냥 동네 집?
담장 너머로 멋지게 가꿔진 정원이 보인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하이델베르크 성은 14세기에 세워졌고 17세기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세력 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후 지속적으로 복구를 시도했으나 그 후에도 계속 전쟁에 휘말려 완전히 복원하지 못한 채 일부 파괴된 모습이 남아 있었다. 깔끔하게 복원된 모습이었다면 이렇게 쓸쓸하고 서늘한 아름다움이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을 버티며 겪은 많은 사건들이 부서진 이곳에, 무너진 저곳에 깃들어 있는 것만 같다.

저 멀리 성이 보이고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우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성의 모습

종교의 가르침이, 그 본질이 결코 침략이나 파괴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종교를 구실 삼아 참으로 많은 잔혹한 일들이 벌어졌고 현재도 여전히, 아마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이나 성직자들 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자신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신의 뜻을 가장한 인간의 탐욕에 의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했는지 잊지 말고 계속해서 상기하고 반성하며 살아간다면 조금은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쪽에는 카페가


성에서 시내를 내려 본다. 내가 좋아하는 색감. 비슷한 색으로 덮여 있는 지붕이 나무의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여기가 뷰 맛집


성의 내부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와인 숙성통이라는 그로세스 파스(Großes Fass, Great Heidelberg Tun)를 만났다. 직역하면 ‘거대한 통’인데 너무 커서 카메라 한 프레임에 들어오지 않는다. 높이 8m에 21~22만 리터의 와인을 담을 수 있는 크기라고 하는데 감이 잘 안 온다. 750ml 와인 병을 기준으로 28만 병 정도라고.

또 이렇게 엉성하게 조각 모음을 해본다

간단히 와인을 마실 수 있는 café도 작게 마련되어 있는데 아직은 남은 하루 일정이 많아 와인은 일단(?) 참아본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오크통이 귀여워 보일 지경


조금 더 들어가면 Apotheken Museum(Pharmacy Museum, 약학 박물관)이 이어진다. 당시 사용하던 기구들과 약병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내용보다는 진열장이나 오래된 전시품의 느낌이 좋아서 아주 천천히 하나하나 들여 보았다.

증류 장치인가? 저울도 보인다
하나의 미술 전시 같은 모습


한참을 성에 머물렀다. 이제는 내려가야 할 때. 이때까지도 케이블카의 존재를 몰랐으니 당연히 걸었다. 내려가는 길도 역시 가파르지만 고즈넉하니 걸을 만했다. (하지만 다시 가게 된다면 케이블카를 탈 것이다. 반드시)

경사는 가파르지만 날씨가 좋으니 즐기자



도심으로 내려왔으니 하우프트 거리(Hauptstraße)를 따라 쭉 걸어보자. 전형적인 중세 유럽 도시의 느낌을 만끽하면서 걷다 보면 시청(Heidelberg Altstadt)성령교회(Church of the Holy Spirit)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시청 앞 광장은 여느 구도심이 그러하듯 주변 레스토랑의 테이블이 펼쳐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 아무렇게나 찍어도 예쁘다



시청 근처는 오늘의 대미를 장식할 중요한 곳이 기다리고 있으니 나중을 기약하며 그대로 하우프트 거리를 쭉 지나쳐서 하이델베르크에 오면 한 번쯤은 가야 한다는 학생 감옥(Studentenkarzer)으로 갔다.

1712년부터 1914년까지 200여 년 동안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치외법권 지역으로 학생이 저지른 경범죄에 대해 경찰은 개입하지 않고 대학 당국에서 처벌을 했다. 결투를 하거나 술에 취하여 경관을 때리는 등의 경범죄를 저지른 학생부터 교수와 크게 마찰이 있거나 잦은 음주로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이 2~3주 동안 이곳에 갇히는 것으로 벌을 받았다. 3일째까지는 빵과 물밖에 주지 않았고 밖으로도 나갈 수 없었으나, 그 후에는 음식 반입도 가능하고 수업도 받을 수 있었다고. 당시의 학생들은 이 처벌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밤에 감옥 안으로 술과 음식들을 반입하는 것을 낭만으로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건물 전체에 빼곡히 남아있는 그때의 낙서들

처음 '학생 감옥'이라는 명칭을 들었을 때 막연히 떠오른 장면은 영화나 매체에서 수없이 봐온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학생들을 보호하던 대학 캠퍼스의 울타리, 그 안으로 잠입해서 시대의 흐름을 와해시키려 시도했던 사복 경찰들, 무고한 시민들을 향했던 무자비한 폭력들, 희생된 수많은 젊음들.

이 시시하고 낭만적인 공간에서 문득 떠오른 지나치게 거창한 잔상들이 계속 머리에 맴돈다. 그저 한국어로 번역된 이곳의 명칭, '학생'과 '감옥'이라는 두 단어의 교집합이 나에게는 그런 이미지로 저장되어 있나 보다.

낚서를 하면 처벌됩니다! 웃음 터지는 경고문



학생 감옥을 나와서 얼마 가지 않아 전면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맞닥뜨렸다. 자세히 보니 Universitats-Bibliothek라고 쓰여있다. 독일어는 몰라도 저 단어의 조합이 대학-도서관이라는 건 알 수 있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도서관(Universitats-Bibliothek Heidelberg)이다. 학부를 졸업한 후 어디에서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도서관을 독일까지 와서 들어가게 될 줄이야.

출입증 필요 없어요? 학생증 없어도 그냥 막 들어가도 돼요?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이렇게 아무나 들이시는지요?

얼떨결에 들어가서 괜히 기웃기웃. 일부는 박물관으로, 일부는 열람실로 사용되고 있었고 얼핏 봐도 몇 백 년 되어 보이는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아무도 저지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막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닐 분위기는 아니라서 살짝 구경만 하고 빠르게 나왔다.

시대가 각기 다른 여러 건축물이 모두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여행 책자에서 추천한 학생식당(Zeughaus-Mensa im Marstall)에서 허기를 달래 본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는 멘자(Mensa)라고 부르는 학생식당이 세 곳이 있는데 이곳 Zeughaus-Mensa가 가장 크고 접근성이 좋아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식당 이용에 제한을 두지 않아 누구든지 이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고 다만 학생들은 조금 더 저렴하게 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 엄청나게 빼어난 맛은 아니지만 저렴하게 한 끼 식사를 하면서 대학 학생 식당의 분위기를 경험하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아니었나 싶다.

날씨가 좋으니 다들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한다



배를 채웠으니 이제 다시 걸을 시간이다. 네카어 강(Neckar River) 양쪽을 연결하는 Alte Brucke Heidelberg는 직역하면 '오래된 다리'로 입구에 있는 원숭이 상이 명물이다. (하지만 여행 당시에 나는 보지 못했다는 것이 함정) 사실 유럽의 다른 많은 도시들에서 수많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치장한, 혹은 기하학적으로나 건축적으로 완성도 높은 다리를 많이 봐서 그런지 이 다리는 건축물 자체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에서 올려보는 풍경이 내려 볼 때와는 또 다른 멋진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다리보다는 다리에서 보는 풍경이 더 예술



다리를 건너 좁은 길로 올라가면 네카어 강을 따라 길게 조성되어 있는 산책길을 만날 수 있다. 이 길이 그 유명한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로 칸트, 하이데거 등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철학자들이 이곳을 산책하며 사색을 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철학자들이 어떤 사색을 얼마나 깊이 했는지는 감히 추측하기도 어렵지만 철학은 문외한인 나조차도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 길을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진다. 이 길이 끝날 때쯤에는 머리에 뒤죽박죽 떠오르는 생각이 명쾌하게 정리되길. 의미 없는 바람을 가져본다.

초입부터 나무가 싱그럽다, 경사는 각오해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성과 구도심을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뷰 명당


이번 여행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나온 경험을 떠올리는 사이로 한국에 돌아가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걱정이 비집고 들어온다. 현실의 의무와 책임, 생계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미루고 떠나온 이 시간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더 간절했고 그래서 더 소중하게 모든 순간을 밀도 있게 보낼 수 있었다는 게 어쩌면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지나가 버릴 한 순간에 전력을 다하는가.


괜히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오늘의 피날레를 경건하게 맞이하러 가보자.

태양이 뜨거운 이런 날씨에, 머리까지 복잡하다면 당연히 맥주를 마셔야지. 자체 양조장을 보유하고 맥주를 만든다는 레스토랑 Vetters Brewery로 직행했다. 샘플러로 모든 맥주를 다 맛보고 싶었지만 혼자 마시기엔 양도 많고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어 시원하게 한 잔만 맛보고 가기로 했다.


독일 식당에서 맥주를 주문할 때 용량을 보통 네 가지로 구분하는데 Kleins(Small) 0.3l / Halbe(Half) 0.5l / Maß 1.0l / Faß(Keg) 5.0l 단위로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당연히 0.5l 몇 잔을 시켜 마셨는데 주문을 받는 종업원들이 처음에는 이 사이즈를 주문하는 게 맞냐고 몇 번을 다시 물어보고 2~3잔 정도 마시면 괜찮냐고 수시로 물어보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의 동양 여자애가 저걸 다 마시고도 괜찮을지 걱정하는 건지, 과욕을 부리다가 취해버린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런 건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캐러멜 같은 색을 가진 wheat beer,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이런 메모를 남겼었다.

이 여행이 끝나기 전 다시 가고 싶은 도시를 딱 한 곳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하이델베르크를 선택할 것이다. 산 중턱에 있는 성으로 오르던 가파른 길이나 그곳에서 내려본 도시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아른거리고 학생 감옥에 가득한 낙서들도 기억에 선명하지만 나는 도시 맞은편 관광객 드문 그 산길이 가장 그립다. 철학자의 길이라 불리는 바로 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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