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6. 03-2019. 05. 09
헐벗은 나무들이 사는 태산 아래 염치를 모르고 우뚝 선 잿빛 건물. 사지가 냉정하게 각진 그 건물은 순도 백 프로의 무정함으로 건축되었다. 나는 그곳을 무저갱이라 불렀다. 스스로 지정한 나의 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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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저갱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람은 조금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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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는 바람이 떠미는 대로 떠밀려 나아간다. 스윽스윽, 화사한 얼굴로 검은 진창을 쓸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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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눈을 감는다는 게 기절하듯 잠이 들었고, 세수를 하다가는 코피가 또 터졌다. 머리를 너무 굴려서 가만히 있어도 눈알이 핑핑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숨만 쉬어도 현기증이 난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가장 묻고 싶지 않은 걸 자문할 때마다 혀를 물고 싶어 진다. 책상으로 향하는 두 발이 기계적이다. 너무 오래 꼿꼿해서 구부러지는 걸 잊어버린 허리에선 비명이 들린다. 눈을 감을 때다. 뇌주름 사이에 끼워둔 노랫말을 꺼내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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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서툴러서 필사적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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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도마에 칼이 박혔다. 조리대에서 날아온 닭목뼈가 내 뺨을 치고 반찬통으로 떨어졌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 사람을 봤다. 그 사람이 이마를 짚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왜 자꾸 그래요. 내가 괜찮다는데 왜.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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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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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말 듣지 마. 그들은 우리를 몰라. 너를 몰라. 아무도 몰라. 다 믿지 마. 어차피 진실은 감춰질 거야. 아주 크고 단단한 공간 속에 은폐돼서 밖으로는 비치지도 않을 거야. 너도 알잖아. 진짜는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보는 거야. 네가 나를 알아본 것처럼. 나머진 다 가짜야. 가짜야 정신 팔리지 마. 다치지 마.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제발 하지 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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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창 없는 혐오지대, 자신의 뺨을 때리는 구간이 반복되면 어금니 물고 되뇐다, 반드시 행복해져야 한다고. 네가 두고 간 당부. 나는 아직도 그걸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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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제일의 것
가장 크고 단단한 것
소중한 건 다 거기다 넣는 거야
내가 거기 숨었다는 비밀도
아무나 다 몰라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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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기다렸다는 듯 찬바람이 몰아쳤다. 우수수수 흔들리는 나무들이 요란한 환영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나무들은 그림자가 없었다. 왜인지 거대해진 내 그림자가 나무의 그림자를 전부 삼켜버렸다. 내 그림자는 이제 웬만한 숲보다 컸다.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비대한 실루엣이 출렁거렸다. 예쁘진 않았지만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만큼 키가 커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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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것뿐인데 잘못한 기분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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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단념하지 않은 유일한 애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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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도 구멍이 났겠지
내가 없는데도 그 구멍 사이로 내가 자꾸
질질 새서 먹먹하던 날들
너도 있었겠지
살결이 시려 두 팔로 온몸을 비벼대도
해가 뜨지 않던 밤들
너도 보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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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를 다 해야지
그마저도 못하면 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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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마주하는시간만큼돈독한관계라고믿었던열몇살은너무지난과거뇌주름바짝조여추억해봐도서리낀거울향수도감흥도습관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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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엔 온통 주인 잃은 날개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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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적당히 미친년은 이래서 죽고 싶어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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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씨앗의 몸으로 세상에 온 네가
가녀린 팔을 움텄을 때
내 몫의 기적이 일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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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 들러붙는 계절 애도는 쉽지 않고
너와 머무는 빈소에서 변소까지는 한 걸음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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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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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 잡고 자아를 재단하던 타란툴라의 시절
함부로 죽은 문장들로 거미줄을 치장하고
진정으로 걸려든 이들의 심장을 실 하나에 꿰었지
유혹은 어렵지 않아 외로움을 헐값에 팔면 된다
만년 떨이야 사랑은 덤이지
살아나기에 필요 없는 것들
내 창고는 작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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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를 맞대는 건
완성하지 못한 침묵을 잇는 의식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몸을 기울이고 묵음으로 발악을 치는 것
말하지 마 쓰지 마 아무것도 보여주지 마
너를 너로서 남길 방법은 그것뿐이야
오물로 태어났으면서
오염되는 건 싫다고
미소로 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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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달리는 동안 나는 훔쳤어
네가 차버린 자갈 하나
너와 내가 나란히 밟고 간 들꽃의 얼굴
나는 바닥을 봐
너는 하늘을 우러르고
손은 놓지 않아
점점 벌어지는 우리의 그림자를
네게 알려주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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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우리를 지나 내일의 우리로
공기보다 가볍게 주고받는 말로
낟알씩 부식되는 우리로
희망적이라 했다
태양이 머리 위로 로맨틱하게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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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닥에선 나도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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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해지는 게 마땅한 거야.
우리의 무기력은 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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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틈쯤엔 기도를 올렸다. 여기 이 행간을 뚫고 나가게 해주세요. 너의 활자를 어미 삼아 다시 태어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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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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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불분명하고 불분명하기에 어려워, 어려워서 지쳐, 지치니까 부정하고 싶지. 나는 불안하지 않아. 너를 모르지 않아. 거짓말은 쉽고 연극은 알림도 없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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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당신을 생각해. 처음부터 없던 건 아니고 있었지만 없어진 당신. 그냥 있던 것도 아니고 예뻤던 당신. 예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다정했던, 다정하지만도 않고 즐거워하던. 그래, 즐기던 당신. 당신이 말했다,
파란 피를 가져서 즐거워. 누구와도 닮지 못해 신이 나. 보통이 될 수 없다니 기적 같다. 그거 알아? 혐오를 업으로 삼아도 사랑은 멈추지 않아. 몸을 열어 차별 없이 받아들이자. 나를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야. 아무나 다 들어와. 만석이라도 거절은 없다. 놀이는 평등하니까. 비슷비슷한 삶끼리 지지고 볶는 거야. 삶의 모양을 따지지 마. 누구 색이 붉니 검으니 재지 마. 중요한 건 호흡이야. 누군가 뛸 때 누군가는 걷는다. 그 방식만으로만 엎치락뒤치락하는 거야. 나와 다른 남에게 의미두지 마. 어차피 우리는 목적지가 같아.
당신을 생각해. 당신이 세상에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없어진 것이 세상이 아니고 왜 당신인지를 생각해. 나는 생각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 이제 당신과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 생각해. 나는 당신을. 생각해, 당신을. 나는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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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복
불
가
능
떨어지지 않는 명찰로 왼 가슴에 붙였는데
오른손으로 감추고 맹세를 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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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게 절망을 토할 때 나는 우리를 배웠어.
2016. 06. 03 –2019. 05.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