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잔하게 Aug 10. 2024

변한 듯하면서도 변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구나


창 밖으로 풀 베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침부터 시작한 제초 작업이 오후 내내 이어지고 있다. 태양이 가장 높이 떠있을 때. 기계를 지고 단지 내 화단을 훑고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다 너는 이마를 구긴다. 이 더위에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며. 너는 막 세수를 하고 나온 참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점점 복잡한 마음이 들어서 너는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12층인 너의 방에서 1층이 보일리 없다. 그런데도 너는 눈을 떼지 못한다. 기계 소리와 풀 냄새가 네 방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다. 달궈진 쇠처럼 뜨거워진 얼굴이 식지 않는다. 식지 않는 얼굴들. 너는 그게 괴롭다. 볼 안쪽에서부터 간지럼증이 인다. 너는 지체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화장실로 간다. 차가운 물을 몇 번이나 얼굴에 끼얹는다. 이런 짓도 오늘로 벌써 다섯 번째다. 다음번에는 옷을 모조리 벗고 샤워기 아래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아토피 환자에게 만만한 계절이란 없다. 마주한 계절이 늘 최악의 시간 같다.


점심 무렵에는 B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새로 구매한 책들과 지금 읽고 있는 책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늘 막 나온 시집을 둘 다 주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폭소했다. 서로 하는 짓이 그처럼 같다니.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일체감이 새삼스럽게 소름이 돋아서 너는 B에게 끈질긴 더위가 한순간에 싹 가신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B 또한 같은 어조로 호응하며, 오늘치 즐거움을 다 채워서 뿌듯하다고 말한다. "이 즐거움을 기억하며, 남은 하루도 즐겁게 보냅시다!" 대화 채팅방에 하트 대신 너 자신이 날아가는 상상을 하며, 너는 지긋지긋한 코로나와 정도를 모르는 무더위가 과연 언제쯤 수그러들지 예상해 본다. 책 이야기를 하고 싶다. 북토크에 참여하여 좋아하는 작가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지역 곳곳의 서점을 탐방하고,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정신없이 소개받고 싶다. 불과 몇 년 전에 즐기던 그 일들을 멈추는 일 없이 이어가고 싶다. 그리움이 너무 길어 그리움인지도 모르게 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운 사람들은 꿈속에 나왔다. 그들과 비싼 차를 타고 해안을 따라 달리다가 모르는 사람이 내는 퀴즈를 풀었다. 너희가 머리를 맞대고 써서 낸 리뷰가 대상을 받았다. 맥락을 찾을 수 없는 꿈 속에서, 너는 그 꿈이 곧 일어날 일을 보여주는 거라고 믿었다.




2021. 07. 27

지긋지긋한 코로나와 정도를 모르는 무더위 속에서





글이 막힐 때면 편지 형식으로 바꿔서 쓰기도 한다. 대상이 분명해지면 글쓰기가 좀 더 쉬워진다. 줄글로 된 일기 쓰기가 서툴렀을 땐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 어릴 적에도, 지금도 종종 쓰는 방식이다. 긴 시간 해온 일이어서인지 이쪽이 내게 가장 편한 글쓰기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다른 글보다 공개하기가 부끄럽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날의 일기는 신기하게도 어제오늘의 나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며칠 전 아파트 제초 작업이 있었고, 오늘은 아침부터 볼 안쪽이 간지러워서 여러 번 세수를 했다. 오후에는 B에게 연락이 왔는데, M과 함께 서점에 가 있는 모양이었다. 7월에 이어 8월에도 꼼짝없이 컴퓨터 앞에 묶여 있는 터라 밖을 나가지 못하는 처지도 비슷하다. 2024년을 살았는데 2021에 겹쳐지는 하루. 어쩌다 얻어걸린 우연일 테지만, 그래도 이런 걸 보고 나면 사람은 참 변한 듯하면서도 변하지 않고 살아가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허무하면서도 어쩐지 자신이 더 애틋해지는 기분.
이전 16화 운동하기에 좋은 계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