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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Aug 17. 2024

나와 나

어릴 때 벗어놓고 온 몸


비밀스럽게 도착한 편지에 수신자 이름이 없었다. 발신인은 모르는 사람. 주소는 정확했다. 아무에게도 알려준 적이 없는.


편지 봉투를 뜯으니 기억이 뜯겨 나왔다. 타인의 훼손된 기억. 기억은 본래 무채색이다. 피를 흘릴 때나 색을 갖는다. 나나 씨는 노란 피를 가졌구나. 나나는 나가 두 개여서 나나. 최초의 분열. 가장 진한 자아의 이름.


노란 피로 얼룩덜룩한 편지지에는 조각난 마음이 전시되어 있고 마음은 고차원으로 현실을 환상적으로 재연한다. 손안에 피로 물든 편지지 위로 상영되는 기억.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람이요?

냉정하게 말하지 마

어머니는 주무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웃음이 나와?

오늘이 제 생일이래요

끔찍한 년

역겨움 많은 생을 살았습니다


나와 나가 서로의 뺨을 때리며 주고받는 대화. 낯익음. 어릴 때 벗어놓고 온 몸처럼. 탈피해도 피부에 남는 자국. 어떤 말은 나의 수명을 산다. 몸보다 영혼보다 선명하게 산다.


나나 씨가 편지봉투에 내 이름을 적지 못한 건 내가 나를 자꾸 벗어서. 탈피해서. 다른 몸을 꿈꾸기를 멈추지 않아서.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서. 나가 나를 포기한 값. 맞춤법은 틀려도 수치는 정확했다.


나는 이름이 없다.


주소는 심장에 새겨져 있는 법

오배송은 없다


나와 나

외로울 수 없는 짝

짝은 한 몸


몸살이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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