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도망 노비’는 경신 대기근과 을병 대기근 등의 전국적인 흉년으로 인한 생계의 어려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과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 신분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신분 해방 등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매우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18세기 이후 도망 노비가 보편화되었으며 이는 양반층의 주요 수입원 감소로 이어졌다.
김도형 전북대 국문학과 교수가 공개한 ‘고창 함양 오씨 문중’의 호구단자에 따르면 ‘곱덕’은 108세가 되는 고종 16년(1879년)까지 ‘도망 노비’였으며 ‘곱덕’은 90년 가까이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동해시(옛 삼척도호부 도하면) 소재 김구혁(金九爀) 가문의 호구단자와 준호구에도 도망 노비가 5대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 사례가 있다.
[참고]
1) 호구단자: 戶口單子, 조선 시대에 3년마다 행하는 호구 조사 때 호주가 집안 구성원과 노비 목록을 적어서 관에 제출한 문서.
2) 준호구: 准戶口, 해당 가호의 호구에 관한 정보를 기존 호적대장에 근거하여 관에서 발급하는 문서로 가호 구성원의 신원을 증명하거나 노비의 소유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구혁 가문의 호구단자와 준호구에서 도망한 노비 중 비(婢, 여자 종) 3인에 대한 예를 살펴보면 차월(次月)과 기단(己丹)은 각각 1738년(무오)과 1739년(기미)생으로 둘 다 1754년(갑술)에 도망하였으며, 명분(明分)은 1747년(정묘)생으로 1769년(기축)에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도망 노비 3인의 기록은 김구혁의 고조부인 김태명(金台命)의 1700년대 중후반 호구단자에서 시작하여 1858년 김구혁의 준호구에 이르기까지 계속 기록되고 있다가 김구혁의 아들인 김교희(金敎喜)의 1861년 준호구에서 그 기록이 삭제될 때까지 약 90~100년간 유지되었다. 도망 노비의 기록이 5대에 걸쳐 작성되었다는 것은 도망 노비가 계속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 3인의 여종이 90~120년 동안 살 확률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나 이 기록이 오랜 시간 계속 대를 이어 호구단자와 준호구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시대 종모법에 따라 이 여종이 자식을 낳았을 경우 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으므로 계속하여 기록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매년 주인가에 바쳐야 하는 세금 부담과 과도한 노동 부담 등에 시달리면서 노비들의 도망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경작할 논밭이나 이를 살 돈도 없이 또는 경제적 자립기반을 갖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이 무작정 도망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설령 노비가 도망에 성공한다고 해도 남아있는 가족을 압박하여 도망간 노비의 소재를 파악 하는 등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주인이 언제 다시 추적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안정적인 삶을 해 나가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도망 노비의 증가와 종모법, 납속책, 노비면천법 등 제도적 변화가 발생하면서 실질적 신분제 해방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