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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혜정 Mar 16. 2024

아릿한 홀로서기

드디어 혼자 미술학원을 가다

 언제나 함께였다. 학원 가는 길은. 매번 가는 곳이기에 익숙하지만 엄마, 혹은 아빠와 손잡고 가는 것을 원했던 아이였다. 그 마음이 때론 따스했고, 언제까지 옆자리를 내어줄지 모르기에 감사했다. 아이가 바라는 한 기꺼이 동행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아들의 아동기는 언제까지나가 지속되지 않을 것이기에.


 "키 작은 2학년과 키 큰 1학년은 분명히 다릅니다. 작아도 2학년의 포스는 느껴지거든요."


 학부모 간담회 때 교장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겉모습은 왜소해 보일지라도 축적된 아이의 시간은 분명히 차이를 낸다. 1년이라는 시간은 그 흘러버려지지 않은 아이의 성장폭이다. 속도는 다르지만 지나온 시간만큼 아이는 깊고 또 넓어져 간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수 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한 다발의 여유가 배달된다. 평일에 도저히 짬이 나지 않아 미루었던 일들을 잽싸게 처리할 수 있는 틈새 시간이라고나 할까. 출판사에 넘긴 원고를 교정 보던 중 편집장님이 수정 보완을 요청하셨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손보지 못했던 작업을 이제 완료했다. 마지막 영어 필사책 원고를 다시 들추다 보니 교사로 완전 변환된 회로에 기분 좋은 스파크가 튄다. 빨간 머리 앤 다음으로 나올 책에 대한 설렘으로 일주일간 방전된 배터리 채.


 느지막하게 일어난 아이와 침대에서 뒹굴다가 "오늘은 링키우디 가는 날이야!" 했더니 쌍따봉을 날린다. 아들은 만들기와 창작을 좋아한다. 언제나 기다리는 미술 작업 시간, 아침을 먹고 아빠랑 엄마 중 누구랑 갈지 고민하다 엄마랑 가겠다한다. 당연히 아빠랑 가겠거니 하고 나갈 채비를 하지 않은 터라 귀차니즘에 툭 한마디 던졌다.


"이제 2학년 됐는데 혼자 가봐."

"네, 혼자 가볼게요."


오잉? 괜히 마음이 찔려서 마칠 때 데리러 가겠노라 뒷수습을 다.


"아니에요. 왔다 갔다 둘 다 혼자 해볼게요."

"이야, 정말? 담임 선생님께 자랑해야겠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봐주고 베란다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을 확인한 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정문을 돌아 횡단보도 건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현관문까지 열고 나가 아파트 복도 창문에서 아들을 크게 부르 있다. 길 건너던 아이가 아빠에게 호응하느라 신호에 걸릴 뻔한다. 요란한 부모들 같으니라고. 혼자 걷는 아이의 첫 시도에 격려와 응원을 담아주려다 큰일 날 뻔했다.  


 어쩌면 아들의 첫 시도는 다른 친구들보다 늦었을지도 모른다. 채근하며 시작하는 것보다 아이의 때에 스스로 발을 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그저 기특 뿐이다. 아이와 함께 걸었던 지난 1년의 시간이 흩어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간 것에 뿌듯하면서도 살짝 아릿하다. 젖떼기 작업, 매번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실명을 하게 된 여인이 있었다. 남편은 그녀의 일상생활과 회사 출퇴근을 도와주었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자립할 것을 요구했다. 갑자기 혼자서 출근을 해야 했던 그녀는 처음에 큰 상처를 받았지만 이를 악물고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넘어지기도 했고 길을 돌아가기도 했으며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견뎌내어야 했다. 그래도 어제 보다 오늘이, 오늘 보다 내일이 나아지는 변화가 찾아왔다. 그녀는 혼자 출퇴근하는 점차 익숙해졌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혼자 버스에 오르던 그녀에게 운전기사가 말을 걸었다.


"부인은 참 좋으시겠어요. 남편분이 한결같이 출퇴근길을 돌봐주고 계시다니요."


 순간, 그녀는 남편의 존재를 감지했다. 알고 봤더니 그는 매일 같이 그녀의 서 말없이 동행하며 지켜주고 있었다.




"예수님, 제가 힘들 때 대체 어디 계셨나요?"

"난 너를 업고 함께 걷고 있었다."


성경에서 스며 나오는 따스한 사랑처럼 스토리가 주는 잔잔한 감동에 잠긴다. 아들의 홀로서기, 마냥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방해하지 않고 뒤에서 지켜주고 싶다. 비록 가까이에서 보일 듯 말듯한 엷은 존재감이더라도 분명히 함께하는 동행으로 아들의 뒤를 묵묵히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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