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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Mar 14. 2022

펜 한 자루

문구사


얼마 전 제주 시내에 갔다가 클래식한 문구 전문점에 들렸다. 요새 이러한 전문적인 문구사가 인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직접 가본 적은 처음이었다. 하긴 최근 들어 '문구류'에 진심인 사람들이 쓴 책을 많이 보기는 했다. 암튼 그 문구사엔 일반 문구점에서 볼 수 없던 다양한 종류의 연필, 지우개, 볼펜, 노트, 테이프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전에 알던 일반 문구와는 달리 조금 더 세분화되고 고급진 문구류를 보니 나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서 나도 일반 문구점에서 볼 수 없었던 샤프펜슬을 하나 구입했다. 내가 이것을 잘 사용할 수 있을까?




제주 클래식 문구사




그리고 며칠 후, 일반 문구점에 들렸다가 펜을 사게 됐다. 오랜만에 산 그 펜은 내가 어린 시절, 즐겨 사용했던 펜이다. 중학교 때인가 입학하며 색색깔로 (중학생부터 펜으로 노트필기를 했다) 샀는데, 바닥에 떨어트려 펜촉이 망가져서 쓰지못하게 되버려 피눈물 흘렸던 적도 있다. 아무튼 그 펜을 산 날, 우연히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달이 월급을 받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돈이 참으로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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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

하지만 정작 내가 돈이 좋다고 느낀 것은 아주 시시한 것에 돈을 쓸 때다. 하나에 3천 원도 넘는  3mm짜리 하이테크 펜을 색깔별로 사면서 돈 쓰는 맛을 느꼈다면 알만하지 않은가.
.


195p, 나는 용감한 마흔이 되어간다, 윤지영 지음




그의 직업은 교수인데, 펜 하나로 돈 쓰는 맛을 느끼는 이 소박 함이라니... 그는 펜 말고도 A4 용지를 박스째 들여놓는다든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사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있다. 그 작은 기쁨을 알고, 오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이 뿌듯해졌던 것은 왜 일까. 나도 공감하는 바이기 때문일까.



왜 저 글에 마음이 갔나 했더니, 내가 샀다던 펜이 바로 하이테크 펜이기 때문이었다. 그 많고 많은 문구점이 있는 서울에서도 사지 않던 펜 하나를 왜 제주까지 와서 사게 된 걸까. 심지어 제주시에서는 문구점을 간 적이 없었기에 무려 서귀포에 갔을 때 샀다. 내 핸드폰 메모 쇼핑리스트에는 다이소에 가면 사야할 것 , 한살림에 가면 사야 할 것, 마트에 가면 사야 할 목록이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는데, 이 펜은 etc...로 문구점에 가면 사야 할 것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문구점에 가는 날은 일 년에 두 번은 되려나?)



서귀포에서 다녀온 그 문구점은 '아트박스'였다. 내가 어릴 적부터 예쁜 소품과 캐릭터 등등을 팔았던 그 문구점이 여전히 건재하게 남아 지금도 핫한 상품을 가득 진열하고 있었다. 그곳에 다녀온 이유는 '선물을 담을 예쁠 쇼핑백'과 '어머님 생신에 쓸 카드'를 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하이테크 펜. 펜이야 집에 널리고 널린 게 펜이라 사지 않아도 돼서 아마 아트박스에 들렸어도 그대로 나왔을 수도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기 직전 남편이 상기시켜줬다. "지난번에 하이테크 펜 사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문구점에 가기 어려운데 들렸을 때 있나 보고 하나 사" 리마인드 시켜준 남편 덕분에 난 집에 있는 수많은 펜을 뒤로하고 하이테크 검은색 4.0mm 펜을 사 올 수 있었다.




탐나던 펜




아마도 펜을 사본 지 10년도 넘은 것 같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받아온 펜으로 잘만 쓰고 살았다. 때론 공짜로 얻은 펜이 맘에 들어서 그것만 애정하고 사용해 본 적도 있다. 지난 기간 동안 펜을 사야지, 펜이 갖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특히 나는 다꾸에 열정 있는 사람이 아니라(요즘 다꾸가 다시 유행이더라) 그냥 다이어리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편하게 쓸 수 있는 펜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펜을 샀다. 특히 하이테크 3.0 mm는 펜 촉이 너무 가늘어서 내가 사용하기엔 맞지 앉는다. 이왕이면 5.0mm가 안정적이고 좋은데 아트박스에서는 3.0과 4.0 밖에 고를 수 없어서 4.0mm를 사 왔다. 저 글에서 보면 펜 하나가 3천 원이 넘는다고 그러던데 왜 때문인지 제주에서 산 하이테크는 딱 3천 원이었다. 내가 어릴 때 하이테크 한 개에 2500원이었던 것 같은데, 무려 그게 20년도 된 일인데... 다른 물가에 비해서 펜의 물가는 제자리인 것 같다. (그래서 덜 부담스러웠다. 펜이 하나에 5천 원이나 하면 좀 버겁지 않나)



어릴 때는 나도 펜을 모으고 또 모으는 사람이었다. 특히, 동그란 펜 뚜껑의 정말 다양한 색을 가진 일본 sakura펜(반짝이도 나왔다)을 좋아해서 용돈이 생길 때마다 사고 또 사고는 했다. 그때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아까워서 다이어리 쓸 때나(그때도 다꾸가 유행) 잠깐 쓰고는 했다. 동글동글하게 그려지던 그 펜의 감각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결국 나중에 시간이 지나 펜을 모두 정리했는데, 그 비싸게 (적어도 그 당시 2천 원, 용돈을 다 써버리지 않았을까) 사서 모았던 것들은 당연하게도 잉크가 모두 굳어서 사용할 수 없었다. 아까워라... 그냥 자주 사용해서 모두 써버릴 껄. 그동안 내가 샀던 모든 펜들의 결말은 '전부를 사용해서' 버린 적은 한번도 없고 결국 아끼다 똥이 된 채 버려졌던 것 같다.











다행히도 지금의 나는 문구류에 관심이 없다(관심사가 매우 다양한 편인데도 불구하고). 매년 한 개의 다이어리와 이번에 산 하이테크 펜 한 개면 충분하다.



그런데 펜을 생각하면 어린 날 용돈이 생길 때마다 하나씩 사서 모으곤 했던 소중했던 추억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일상에서 나의 어린 시절의 한 순간을 한 번씩 떠올리는 것도, 성인이 되어 때때로 문구류를 사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일도, 이 모든 것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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