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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Apr 11. 2022

때로는 쇼핑 욕구 제로인 날이 있지


오랜만에 제주 구시가지에 갔다. 제주 구시가지에 가면 동문시장도 있고, 칠성로도 있고, 지하상가도 있고 그 주위에 구경할 곳이 많아 재밌다. 아무래도 제주에서는 차 타고 카페, 마트, 미술관, 맛집, 뭐 이렇게 네비 찍고 이동하는 수순이라 걸을 일이 없는데, 제주시내에 나가면 차를 주차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걸어 다니면서 한량 놀이하는 재미가 있다.



특히나 오늘은 월요일. 얼마나 시내가 한가했겠느냐, 월요일엔 동문시장도 한가하다. 일단 부푼 마음을 가다듬고 카페로 갔다. 그리고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커피가 많이 담겨서였을까, 내가 흥분 모드여서 그랬을까 커피가 받침에 다 엎질러졌다. 커피를 절반 정도만 마신 느낌이다. 정말 맛있는 카페모카였는데 아쉽다.  카페는 옆에 빵집이 함께 붙어있는데, 오늘따라 아침에 아이가 밥을 너무 많이 남겨서 처리하고 오느라 배가 불러서 빵이 당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을 포장해갈까,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집에 냉동실에 가득한 빵이 생각나서 그만뒀다.




아까운 내 커피




일단 날씨가 추운 듯 안 추운듯해서 지하상가로 내려갔는데 손님이 한 명도 없다. 역시 월요일의 힘이다. 그리고 지하상가가 닫은 곳이 훨씬 많았다. 그래도 닫혀있지 않은 그 몇 개의 상점을 열심히 훑어봤다. 열려있는 신발가게가 보여서 아이의 신발을 구경했다. 주인이 오셔서 아이가 몇 살이냐고 했다. 7살이라고 하니까 나보고 말도 안 된다고 대학생 같다고 하셨는데,  나에게 신발을 팔려고 하셨던 걸까? 아니면 정말 내가 어려 보여서 그랬을까? 진심 궁금하다. 다음번에 또 들려봐야지. 아니면 단골 멘트일까? (갑자기 슬퍼지려고 하네) 암튼 지금 가진 아이 신발이 많다는 것이 갑자기 생각나서 여름 신발을 살 때쯤 다시 와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지하상가에 열린 옷 가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요즘 유행한다는 와이드 팬츠를 드디어 입어봤다. 분명 개인샵이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주인이 신경조차 안 쓰는 곳이라 한번 나도 입어볼까? 해서 입어봤는데 정말 편했다. 확찐 살이 표시 나지 않을뿐더러 넉넉한 사이즈가 활동하기도 편하더라. 그런데 갑자기 위에 뭘 입어야 하지 고민이 들었다. 거기에 너무너무 너무 길어서 수선을 해야 하는데 수선을 하면 왠지 이 fit이 안 나올까 싶어서 다리 짧은 나를 탓하며 다시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래도 인터넷으로 정말 주문하고 싶었는데 안사고 입어본 것이 신의 한 수다. 휴, 큰일 날뻔했다.









오랜만이다 동문시장. 나는 동문시장에 가면 회를 사는 것이 아니라 회를 구경한다. 자꾸만 나에게 기념품을 팔려고 해서 (한라봉이라던지, 귤 디저트라던지) 난감하지만 웃으며 지나가면 되니 괜찮다. 동문시장은 시장인데 뭔가 내가 원하는 시장은 아니다. 나는 단지 관광객들 사이에서 관광객 인척 지나가는 1인이다. 오늘은 꼭 사랑 분식에 가보고 싶었다. 지난번에도 사랑 분식이 닫아서 못 먹고 돌아왔는데... 오늘도 한번 가봤는데 이제 아예 월, 화, 수 휴무라고 한다. 현지 도민들이 추천하는 떡볶이 맛집인데, 6개월이 되도록 먹지 못했다. 다음번엔 꼭 목, 금요일 중에 와봐야겠다. 그러면 아쉬운 대로 오메기떡 맛집을 찾아가서 사 올까 했는데 오늘따라 오메기떡이 구미에 당기지 않는다.



동문시장을 빠져나와 칠성로로 갔다. 칠성로는 처음 걸어본다. 내가 어릴 때 살던 지방 시내 느낌과 비슷하다. 지방의 시내는 다 이렇게 생겼구나 하면서 웃음이 나온다. 그 길을 걸어가 본다. 걷다 보니 아트박스가 있다. 그곳에 뭐 예쁜 것 없나 한참을 구경한다. 한 10년만 젊었어도 다꾸도 하고, 또 뭐든 열심히 사서 모았을 텐데 지금은 사는 모든 것은 짐이다. 그래도 예쁘고 귀여운 것을 한참 구경한다. 아트박스를 나오니 맞은편 옷가게가 있길래 가서 또 구경을 했다. 요즘 유행하는 옷은 무엇일까 한참 살펴본다.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몸에 옷을 대봐도 역시 요즘 유행하는 옷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엔 나는 너무 나이 들었다(슬프다). 아무 옷이나 입어도 예쁠 나이는 지났다. 이렇게 쇼핑 욕구가 꺾여서 옷 가게를 나온다.



현재 쇼핑 스코어 0. 내 손에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다. 오, 대단하다! 분명 지하상가를 거쳐 동문시장, 칠성로까지 거쳤는데, 갑자기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대견한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졌다. 왜냐하면 올 겨울 먹지 못하고 지나간 붕어빵 가게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붕어빵 가게로 들어갔다. '그래! 먹어서 없어지는 것은 괜찮지.' 사실 쇼핑하지 않은 것을 핑계로 올 겨울 붕어빵 가게를 찾지 못해 못 먹었던 터라 눈앞에 보이길래 산 것일 뿐이다. 이 봄이 가기 전에 붕어빵을 먹어보다니! 다른 쇼핑보다 훨씬 더 감격하였다.




쇼핑대신 붕어빵




오늘은 쇼핑을 참지 않았다. 사고 싶은 몇 가지가 있었는데 막상 사려니 나와 어울리지 않고, 필요하지 않았을 뿐이다.  때론 이렇게 쇼핑 욕구가 0인 날도 있다. 오늘은 1년 365일 중에 며칠 되지 않는, 충동구매가 없는 날이다. 아주 아주 드문 날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날도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물건을 사지 않은 하루, 되려 오늘 기분은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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