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바꿔 생각해봐.
지난 주말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작가님의 책을 빌려왔다. 이전에 빌린 책을 보고 작가님이 제주도에서 살고 계신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최근에 나온 신작을 빌렸는데 그곳에 작가님이 제주도에서 독립서점을 운영한다고 적혀있었다. 작가님이 쓰신 서점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보며 혼자 웃다가 앞표지를 보니 역시 인스타그램 주소가 적혀있었다. 그곳을 들어가 보니 작가님이 운영하시는 서점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 집과는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였다. 오늘 가봐야겠다 마음먹었다.
마침 가고 싶었던 카페가 소길리 근처에 있었다. 그 찻집을 들렸다가 그 서점에 들르면 딱 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날씨가 비가 왔다 흐렸다 해가 떴다 난리를 쳤다. 차를 마시러 가는 딱 그 상황이 날씨와 어울렸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소길리 옆 마을에서 따뜻한 차와 달콤한 디저트를 먹었다. 정말 영국에 온 듯한 느낌의 찻집이었다. 새하얀 폼이 올라간 따뜻한 밀크티가 정말 부드럽고 맛있었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공간이었다.
우린 그 독립서점에 들러보기로 했다. 카페와 서점은 약 10분 거리였다. 서점에 거의 이르러 들어가는 입구가 좁아졌다. 혹시 몰라 우린 바깥에 주차에 놓고 걸어갈까 아니면 가지고 들어갈까 잠시 망설였다. 결국 우리는 차를 가지고 들어갔는데 마침 서점의 옆엔 소길리 사무소가 위치하고 있었고 그 사무소 앞으론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차할 곳이 딱 이었다. 우린 주차를 하고 서점으로 들어갔다.
서점을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작가님을 찾는 일이었다. 카운터 안쪽에 앉아계셔서 잘 보이지도 않는 작가님을 몰래 힐끔거리며 서점을 구경했다. 원래의 의도대로 라면 작가님의 신작을 사서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제주에 꽤 외딴곳에 있는 듯한 이 서점에 은근 손님이 많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다른 책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아주 귀여운 동화책을 골랐다. 제목은 '이 세상 최고의 딸기'이었는데, 딱 보자마자 올해 첫 딸기를 먹고 행복해하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아이는 책을 받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딸기를 먹을 때처럼) 결국 작가님께 말도 못 붙여본 채 책 값만 계산하고 나왔다. 내가 만약 작가님 책을 한 권이라도 들고 가서 아는 척을 했더라면 작가님은 불편했을까, 좋아하셨을까?
화장실 사용금지
책방을 나와서 주차장에 가서 차를 타려는데, 집으로 가는 길이 30분이 넘게 걸릴 테니 화장실에 들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마을 사무소엔 화장실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침 출입문 바로 앞에 화장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 화장실 문 앞에 붙여진 종이에 '사용금지'라고 크게 적혀있었다. '고장이 났구나' 생각하고 2층으로 올라가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언니!!!!" 하면서 문을 쿵쿵 두드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누가 날 부르는 건가? 이게 무슨 소리지?' 하고 뒤를 돌아보니 사무소 관리직원이다. "어디서 오셨어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묻는다. "네, 서점에 왔다가 화장실 가려고 들렸어요" "그럼 서점으로 화장실 가세요. 거기에 화장실 있어요" 나는 갑자기 누군가 나를 불러서 놀라기도 하고 그냥 빨리 화장실을 가고 싶은 마음에 "급해서 그러는데 갈 수 없을까요?!" 여쭤봤는데 완전 단호박이다. "안돼요~ 서점으로 가세요." "여긴 어르신들이 마스크를 잘 안 쓰고 다녀서 외부사람들이 오면 위험해요" "네..." 결국 포기하고 나왔다.
화장실이 엄청나게 급했더라면 아마 서점으로 뛰어들어갔을 텐데, 민망한 마음이 커서 그대로 차를 타고 떠났다. 그렇게 가다가 우린 항몽유적지 간판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화장실을 들렀다 가야겠다 싶어서 차를 세웠다. (우리나라 관광지는 화장실도 너무 잘 운영되고 있다) 다행이다. 공공화장실에서 급한 불을 껐다.
좀 놀라긴 했다. 아주아주 커다란 목소리로 '쿵쿵' 문을 두드리며 나를 부르기도 했고, 난 그냥 단지 공공기관 화장실에 잠깐 들렸던 것뿐인데. 뭐 별일 아닌 일이지만 오늘 하루 중에 일어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기도 하다. 큰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기분이 좋진 않았다. 화장실이 진짜 고장 난 게 아니라 외부사람 사용을 못하게 하려고 써놓은 사용금지 사인이었다니, 되려 제주도의 인심까지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오늘까지 알던 제주도와는 다른 반대의 모습을 알게 된 기분이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기분이 찜찜해졌다. 그래서 더욱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제주에는 관광객이 많으니 제주도 주민들이 보기엔 우리가 모두 걸리적거리겠지. (그런데 나도 제주도 주민인데) 사실 입장을 바꿔보면 이해하기 쉽다. 조용했던 제주도 시골마을에 작은 서점이 생기고 나서 매일같이 들어왔다 나가는 차들, 사람들 그리고 여기 소길리 주민도 아니면서 사무소에 화장실을 이용했던 '많은' 사람들. 그 뒤처리는 사무소 직원들의 몫이었을 테니 충분히 야박할 만했다.
비록 오늘 나는 처음으로 제주도의 다른 면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여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상황이 이렇게 그들을 만든 것인 것뿐이다. 온전히 나만을 위해 내려온 제주살이에 이번일 만큼은 나의 마음보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결국 이곳에서도 살려면 그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최대한 조용히 살다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원주민들이야말로 더욱 조용히 지내고 싶은 마음이 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