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아이는 김치를 좋아한다. 우리가 무슨 음식을 먹든 김치가 거의 필수이다. 미역국, 카레, 수제비를 먹을 때 등등 김치가 필요한 순간은 늘 있다. 심지어 고구마도 김치랑 먹으면 더 맛있으니까. 그러나 남편은 김치가 왜 맛있는지 모르겠단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찾지는 않고, 뭐 어쨌든 그래도 우리 집은 나랑 아이로 인하여 김치가 떨어질 날이 없다(한국사람 다 그렇지 않나?). 새로 만든 김치부터 묵은 김치까지 고루고루 다 필요하다.
김장의 계절이 돌아왔다. 다행히도 시댁은 김장을 하지 않고 김치를 주문해서 드시기 때문에 시댁을 도와 김장을 할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역시 요즘 시댁이다. 그러나 친정은 다르다. 내가태어나 기억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김장을 쉬지 않고 하신다. 가장 기억나는 김장은 매년 아빠 회사의 김장을 위해 정말 많은 사람과 배추를 동원해서 김장을 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김장을 했다. 그래도 그때는 어렸으니까 김장하는 곳에 가면 주시는 수육을 먹으며 역시 김장에는 수육이지 하며 감탄한 기억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가 지나고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친정식구들과 김장을 함께했다. 역시 그곳에서도 엄청난 양의 김장을 하셨다.
그러다 어떤 일이 있었던 모양인지 엄마는 한 2~3년 전부터 혼자 김장을 하시겠다고 선언하셨다. 다른 이유도 있긴 하지만 2~3년 전부터 취미로 시작한 텃밭농사에 배추를 심기 시작하셨다. 이쯤 되면 취미가 아니고 주된 일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배추를 수확해 김장을 집에서 하시기 시작하셨다. 나도 가서 도와드려야 하는데... 마음만 그렇다. 이런저런 일로 아니 핑계를 대며 김장할 때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김장하시느라 고생하시는 것 생각하면 '요즘 세상에 김장을 왜 해, 그냥 사드세요"라는 말을 하고 싶지도 하지만 도와드릴 것도 아니면서, 김치를 받아먹는 나는 잠자코 있는다.
김치... 김치를 생각하면 줄곧 그때가 생각난다. 내 인생 김치가 가장 귀했을 때. 바로 신혼시절 미국에 살았을 때다. H마트(한국 마트)에 김치가 팔았다. 그것도 열무김치, 배추김치, 깍두기 등등 종류별로 팔았다. 문제는 미국 물가와 김치 양에 비해 가격이 비쌌다. 게다가 조금씩 사 먹는 김치라 그런지 더욱 맛있었다. 김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편도 왜 때문인지 그 김치는 잘 먹었다. 지금은 집에 김치가 풍족한데도 먹지 않는 남편을 보면 그때 그 비싼 김치는 왜 이렇게 잘 먹었던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그 비싼 김치로 김치찌개나 김치볶음밥 이런 요리를 해 먹을 수 없어서 정말 아쉬웠다. 미국은 생고기 가격이 저렴한데 그것을 넣어 푹 익혀서 먹고 싶은데 그런 것은 미국에서는 할 수 없는 사치였다. 멀쩡한 김치 한 포기로 그것을 하기엔 김치 값이 고깃값보다 비쌌다. 그냥 배추김치로 먹는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김치를 만들어 봐야겠다 생각했다. 내 실력에 당연히 김장은 당연히 무리였고 김치와 비슷한 것을 몇 번 만들어 봤던 것 같다. 무려 김치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때는 바야흐로 아이가 아직 없었고 가진 게 시간밖에 없던 호시절이다.
처음엔 깍두기였다. 어디에선가 깍두기가 만들기가 가장 쉽다고 들었던 적이 있다. 김장철이 되면 미국의 한국 마트에도 무와 배추 이런 것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다. 미국에 사는 한국사람들은 미국에서도 당연하게 김장을 하는 것 같았다(당연히 사 먹는 사람도 많을 테고, 먹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무가 정말 쌀 때가 있지 않나. 그곳도 무도 정말 쌌다. 커다란 무를 하나 사 가지고 와서 쓱쓱 썰어서 깍두기를 만들어봤다. 양이 꽤 많았다. 레시피 검색해서 만들기도 정말 쉬웠다. 깍두기를 처음 만들다니! 감격이다. 생각보다 맛도 있었다. 그로 그럴 것이 깍두기야 익기만 하면 먹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나는 깍두기를 시작으로 김장계로 발을 조금 들여놓는 듯했다.
그다음은 나박김치였다. 설날에 외할머니댁에 가면 산적, 꼬치와 더불어 꼭 있는 김치가 있었는데 바로 나박김치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김치가 간절하게 먹고 싶은 날이 많아졌다. 그것이 먹고 싶다고 비행기를 타고할머니 집에 갈 수 없으니 도전해봐야 했다. 나도 할 수 있어! 깍두기도 잘 만들었으니 조금 더 용기 내어 나박김치에 도전하게 되었다. 사과, 배, 당근, 오이, 무, 배추, 파 등 골고루 재료를 넣고 그럴듯하게 만들었는데 문제는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이것 참 어떻게 하지?
신혼시절, 나박김치 도전
그래서 나박김치를 들고 가족같이 지내던 아랫집 아줌마에게 가져갔다. 그랬더니 한 입 드셔 보시곤 거기에 액젓과 소금을 쏟다시피 넣으셨다. '어? 너무 많이 넣으시는데??' 하면서 간을 봤는데 이미 나박김치에는 액젓과 소금 맛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겨우 한 입 맛을 봤을 뿐인데 이 상황은 절로 '망했다'라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아줌마는 이제 익기만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결과는 액젓과 소금 덕분에 짜서 먹지 못하게 되었다. 아깝다. 다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랫집 아줌마는 이미 미국에서 40년을 넘게 사신 분이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한국인이지만 분명한 미국인이다. 아줌마가 제일 잘하는 요리는 미트볼인데... 그렇다면 내가 차라리 김치 맛을 더 잘 알 텐데 나는 왜 이 김치를 어쩌자고 아줌마에게 가져갔을까 후회했다.
그 이후로 김장은 어떻게 됐냐고? 사실 김장이라는 것이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겨울 내내 먹을 김치를 대량 담그는 것인데 뭐 저렇게 한두 번 김치를 만들었다고 앞으로 김장을 할리는 없다. 그 이후로 김치는 사 먹는 것이라 생각했고 조금 비싸더라도 꾸준히, 열심히 사다 먹었다. 그러다 다행히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어 엄마가 겨울마다 하시는 김장 덕에 늘 풍족하게 김치를 먹고 있다.
다만 제주에 오니 또 김치가 귀해졌다. 그동안 서울과 친정을 차로 왔다 갔다 할 때마다 필요에 의해 한통씩 받아서 가져다 먹었다. 그러나 제주는 부모님이 오실 때마다 몇 포기씩 가져오시는것이 전부니 또 양이 부족하다. 자연스럽게 지난번 친정에 다녀오며 가져온 몇 포기의 김장김치를 조금씩 아껴먹고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엄마가 택배로 김치를 보내셨다고 연락이 왔다. 그 어떤 택배보다 반가운 택배가 온다! '김치 택배'
아무래도 오늘은 김치파티를 벌여야겠다. 가지고 있는 묵은 김치로 그동안 못 먹은 김치 돼지고기찜, 참치찌개, 김치볶음밥 등등을 만들어 원 없이 먹어봐야겠다. 낼모레 새 김치가 도착할 테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쓰읍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역시 나는 김치 없으면 못 산다. 아무래도 내년엔 꼭 친정 김장에 참여해 부모님을 도와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