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냉장고는 보물상자 같다. 고기, 야채, 김치, 떡 등등등 그 안에 없는 것이 없다. 뭐가 그렇게나 많이 들어있는 것인지 "엄마 어떤 요리해 주세요"라고 말만 하면 바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재료가 가득 들어있다.
부모님 집에 다녀올 때면 커다란 종이박스 가득 음식을 싸주시는데, 냉장고에 있던 고추장, 된장, 각종 야채, 고춧가루, 떡, 등등이 무한으로 나오기 때문에 필요한 것으로잘 챙겨서 가져온다. 그런데 나는먹지 않을 재료들은 절대 가져오지 않기 때문에, 잘 먹을 것만을 야무지게 챙겨 와 두고두고 잘 먹는다. 이렇게 음식을 가져오면 일주일은 마트에서 장을 보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게다가 엄마도 냉장고가 조금 비었다고 좋아하신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다음번 친정에 가면 그대로 꽉꽉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신기하다.
마치 엄마 냉장고는 마법냉장고 같아.
그러나 부모님 집에 갔을 때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놀라긴 한다. 빈틈없이 각종 음식물로 꽉꽉 들이찬 냉장고는 매력적일까? 절대 아니다. 볼 때마다 "엄마 대체 뭐가 이렇게 많아! 좀 버려~" 말하게 된다. 그러다 가끔 냉장고 안의 재료를 자세히 살펴보다 보면 오래된 커피, 과자, 사탕, 우유 등등,,, 날짜 지난 것들이 나오기도 하니 답답할 때도 있다. 그러나 엄마 냉장고를 내가 정리할 수는 없는 일, 냉장고를 열 때마다 한숨이 나오긴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오죽하면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엄마의 냉장고 정리할 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운이 좋은 걸까? 제주 집에는 냉장고가 두 개다. 한 개는 기존에 있는 옵션 중에 하나인 냉장고이고 한 개는 내가 가져간 냉장고이다.
옵션으로 들어있던 냉장고가 집안 내부에 먼저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것을 사용하게 되었고, 내가 가져온 냉장고는 창고에 놓여있다(물론 1년을 연장할 줄 알았더라면 나의 냉장고로 바꿔서사용할 것 같다). 그래서 옵션인 냉장고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창고에 있는 냉장고에는 현재 아이 영양제와 얼려 먹는 곰국, 김장 김치가 들어있다. 당장 먹지 않는 오래 두고 먹는 것들이 보관되어 있다. 여름이 되면서 수박을 주문하면 크기가 커서 잘라서 절반정도는 창고 냉장고에 넣어놓고, 계란도 10개씩 사 먹다가 이제는 한판씩 사 먹는 터라 먹을 만큼만 남기고 남은 재료들이 그곳에서 대기 중이다. 때때로 남편이 사다 놓는 술이나 음료수등이 그곳에 보관되고는 한다. 워낙 내부에 보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양문을 열면 뭐가 들어있는지 한눈에 보인다. 웬만하면 그 냉장고는 없는 취급 하며 산다.
냉장고에 절대 가득 채워 넣지 말자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엄마의 냉장고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 년 전 우리가 처음으로 산 냉장고는 지금 냉장고의 절반보다도 더 작은 사이즈였다.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면서지금은 양문형 냉장고를 바꾸게 되었지만, 그 작은 냉장고로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왜냐하면 신선한 식재료를 그때그때마다 먹을 정도로만 사다 두고 먹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엄마가 제주에 오셨다. 캐리어가 넘치도록 기내용, 휴대용 캐리어 무게를 꽉꽉 채워 가져오셨다. 엄마가 오시기 며칠 전 열무김치가 먹고 싶다고 말하니, 엄마는 부랴부랴 열무김치를 담그셨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이소박이도 만드셨다고 하셨다. 신났다. 역시 친정엄마가 최고다. 게다가 엄마가 만든 여름 김치에 들어가는 대부분 야채들은 주로 엄마가 취미로 지으시는 밭에서 나온 것이라 신선하다. 게다가 당연히 엄마가 김치 만드는 솜씨는 일품이다.
엄마가 만든 열무김치와 오이소박이 그리고 농사지은 것으로 가져오신 호박, 오이, 가지, 토마토, 참외, 상추, 고추, 당근, 양파 감자 (이 정도면 전문 농사꾼 수준) 등등과 부탁드린 반찬인 오징어채와 멸치볶음을 넣으니 양문형냉장고가 빈틈없이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가져오신 야채로 만든 가지찜, 호박볶음, 노각무침 등등으로 냉장고는 미어터질 지경이 되었다.
채워진 것보다 빈 공간이 더 많았던 냉장고였는데 엄마가 오자마자 마치 제주도에 엄마 냉장고를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점은 엄마 냉장고는 분명 볼 때마다 부담스럽고 불편했는데,나의 냉장고는 그게 아니라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냉장고로 바뀐 것이다. 엄마가 부린 마법!
며칠 후 엄마가 집에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냉장고에 들어있던 재료 몇 가지를 꺼냈다. 엄마가 먹으라고 주고 갔지만 그동안 먹지 않았던, 그리고 앞으로도 먹지 않을 재료들을 꺼내놨다. 지난봄 말려놓은 고사리, 씨앗, 들깻가루 등등 몇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할머니가 오셨을 때 가져오셨던 떡도 한 덩어리가 남아있었다. 하나하나의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꺼내보니 작은 봉투에 가득 담겼다.
그것들은 다시 엄마에게 돌려드렸다. 안 가져간다 하시면 버릴 생각이었는데 다행히도 모두 가져가셨다. 그런데 엄마의 냉장고가 걱정되기는 했다. 이걸 다시 가져가시면 그 빈틈없는 냉장고에 또 차곡히 넣으실 텐데 어쩌시려고 다 가져가겠다고 하시나 생각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눈감고 버리자니 아깝고 귀한 재료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사용중인 나의 냉장고
그렇게 엄마에게 냉장고에 방치되었던 재료를 몇 가지 돌려드리고 냉장고 정리를 했다. 평소 정리정돈에 큰 뜻이 없어서 대충 살긴 하는데, 이번에는 냉장고가 가득 차 있으니오래 두고 먹고 있는 재료를 다른 냉장고로 옮겨놓기로 했다. 고춧가루, 깨, 마늘 등등 오랫동안 두고 먹는 재료를 창고의 냉장고로 옮겼다. 그랬더니 내부 냉장고가한결 여유 있어졌다. 그리고 엄마가 가져와주신 야채들과 과일들도 잘 분리해 놨다.
재료를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다음 주에 뭘 해 먹고살지 일주일 식단표를 작성했다. 이렇게 해놓으니 정말로 다음 주 내내 마트를 가지 않고도 음식을 해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엄마의냉장고는 부담스럽지만 엄마 덕분에 일주일이 든든해졌다. 가족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채워둔 엄마의 마음, 이제 조금 엄마의 마법냉장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