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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Dec 21. 2023

10년 차 주부가 살림을 모른다.

며칠 전 가을에 따서 얼려놓은 밤을 쪄먹었다. 찜을 할 때 이용하는 스테인리스 삼발이에 밤을 올려놓고 쪘다. 밤이 포슬포슬 맛있게도 익었다. 거기까지 다 좋았는데 밤을 다 먹고 냄비와 찜기를 씻었더니 바닥에 들러붙은 얼룩이 착색되어 지워지지 않는 거다.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길래 인터넷에 탄 냄비, 얼룩진 냄비 닦기를 검색해서 그대로 해봤다. 문제는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이상하다? 분명 인터넷에서는 이렇게 하면 싹 깨끗해지던데...?' 하라는 대로 해봤는데도 지워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며칠 지나니 그 얼룩진 냄비가 아주 미묘하게 조금씩 닦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서서히 언젠가 다 닦이겠지' 하며 포기했다.



그러다 오늘 유튜브로 노래를 듣다가 중간에 숏츠를 보게 되었는데, 스테인리스 얼룩이 싹 제거된다는 것이었다. 방법은 별것도 아니었다. 과탄산소다를 넣고 20분만 끓이면 된다는 것이다. 솎는 셈 치고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그동안 자주 쓰던 삼발이도 넣고 과탄산소다를 넣고 팔팔 끓였다. 그리고 꺼냈는데 별로 깨끗해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만 냄비에는 이물질이 떠다니긴 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확실히 깨끗해진 것을 보고 나머지 얼룩을 지우기 위해 수세미로 박박 닦아보았다. 그랬더니 와우! 깨끗하게 닦이는 것이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스테인리스를 보니 신기했다. 이게 이렇게 깨끗해질 수 있다고? 그리고 지난번 얼룩진 냄비도 99% 깨끗해졌다. 미묘하게 1%의 얼룩이 남아있긴 한데 그 정도야 정말로 언젠간 지워지겠지 라는 믿음이 생겼다.

아무튼 그동안의 냄비와 삼발이의 얼룩을 보면서 심란했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분명 지난번도 비슷하게 뭘 넣고 팔팔 끓였는데... 왜 그때는 지워지지 않았을까? 이번엔 왜 확실히 깨끗해진 거고? 왜?  이로서 내린 결론은 '여전히 나는 살림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새것처럼 깨끗해진 스테인레스 찜기






올해로 결혼 10주년이 되면서, 주부의 경력도 10년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손맛이 좋아서 음식을 만들면 맛있다.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 맛있다. 아무래도 내게 엄마의 요리솜씨 피가 흐른 듯하다. 아 맞다! 아빠도 요리를 하시고는 했는데 아빠 음식 솜씨도 훌륭하긴 하다.



그런데 요리 말고 문제는 설거지, 정리정돈 등등등의 다른 모든 살림에는 영 별로인듯하다. 사실 설거지는 제일 싫어하는 집안일 중의 하나이다. 이전 집에는 식세기가 있었고, 이번 집에서는 남편이 설거지 담당인데 요즘 남편이 출타 중이라 내가 계속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하기 싫은 일이니 매일 주방에 설거지 거리가 가득 쌓이게 된다. 나중에 쌓인 설거지를 하는 것도 곤욕이고, 먹을 때마다 설거지를 하자니 그것도 싫다.



사실 주방 싱크대에 설거지만 쌓이는 게 아니다, 주방곳곳에 그릇, 음식등이 정리정돈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난리다 난리. 사실 주방뿐만 아니라 거실은 아이가 놀고 난  정리도 하지 않을뿐더러, 계속 너저분하게 놓인 것이 많기도 하다. 하지만 그곳 또한 정리할 것이 많아서 또 포기 상태이다. 그래서 거실-주방(이어져있음) 매일 포화 상태이다.



게다가 내가 주로 사용하는 식탁은 6인용으로 식사할 때 빼고는 내가 책상처럼 사용하는 편인데, 지금 한편에는 크리스마스용품이 올라와있고, 그 옆으로 캘린더, 책 여러 권, 다이어리, 컴퓨터, 아이 장난감, 이면지, 로션, 립밤, 컵 두 개 정도가 올라와 있다. 심지어 아이가 지금 옆에서  종이 접기까지 하고 있는 바람에 더욱 난리난 상태이다.



이제는 그냥 집 자체가 혼돈의 카오스다. 아시다시피 아이 키우는 집은 치워도 치워도 곧바로 다시 더러워지기 때문에 이제 반 포기 상태이다. 게다가 이렇게 적당히 더럽게 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는 그냥 조금씩만 치우며 사는 편이다. 그래서 평소의 우리 집은 누가 갑자기 집에 와서 본다면 마치 집에 핵폭탄이 떨어진 느낌일 것이다.



크리스마스 장식조차 너저분하네...










저분한 집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살림이 싫다. 그래서 살림을 모르는 것 같고, 더 못하는 것 같다. 분명하다. 아마 내가 살림을 좋아했더라면 sns에 나오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정돈된 집처럼 변신했을지도 모르고, 덕분에 인테리어 인플루언서가 되어 지금쯤 잘 나가는 정리왕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하하, 그러나 생각만 해도 고개가 절로 저어지는 상상이다. 말도 안 돼. 내가 그렇게 되었을 리가!!!  



어제, 오늘은 아이가 아파서 집에 있다. 그 의미는 이미 집이 폭탄상태가 기본 베이스인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조금씩 눈에 보이는 것만 치우고, 저녁에 아이와 함께 정리한다면 지금보다 깨끗해질 것이다. 지금도 글을 쓰다가 집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꽉 찬 쓰레기통을 비웠다. 그리고 빨래통에 쌓인 빨래도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아주 잘했어!



매일매일 해야 하는 살림이 있다. 하루 하고, 한번 하고 끝낼 살림이 아니라 마치 밥을 먹듯이, 화장실을 가듯이 늘 해야 하는 집안일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살림을 꼭 잘해야 할까? 그냥 할 수는 없을까?  



다르게 생각하면 살림은 꼭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원하는 선에서 적당히 하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면 좋을 것 같다. 꼭 살림을 잘하라는 법은 없다. 살림을 잘하는 사람은 살림을 하면 되고, 나처럼 살림이 싫은 사람은 가정생활에 크게 타격받지 않을 정도로만 하면 될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되려 언젠가 분명 살림이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말이다.



살림 10년 차, 여전히 제대로 된 살림법 모르지만 괜찮다. 언제라도 나는 살림을 배울 자신이 있고, 지금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내가 완벽한 살림꾼이 되겠어!라는 마음만 먹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나 최고의 우리 집 관리자일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분명 이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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