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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좋아질까?

텃밭 가꾸기 아니 시작하기

by Blair

부모님이 제주에 오셨다. 산에서 딴 드룹과 이름 모를 산나물을 가득 가져오셨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떨 때는 무, 감자, 고구마도 가져오시고, 파, 오이, 호박, 상추, 토마토 당근도 가득가득 들고 오신다. 당연히 마트에서 언제든 살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이번에 밭에서 자랐다고 조금씩 가져다주시는 것이다(그들의 조금은 나에겐 어마어마한 양이다) 아마 부모님 곁에 살았다면 사시사철 마트에서 야채를 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빠, 엄마는 매년 텃밭을 가꾸신다. 한눈으로 보기에도 커다란 텃밭이다. 그곳에 옥수수, 고추, 수박, 호박, 오이, 상추, 토마토 등등 심을 수 있는 채소는 모두 심는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고구마이다. 마지막으로 고구마를 캐고 친한 분들에게 한 박스씩 나눠주신다. 밭농사의 큰 손이다.



물론 그 고구마는 나에게도 온다. 그리고 겨울 내내 두고 먹는다. 달콤한 군고구마. 음~~~ 맛있어.



암튼 사계절 텃밭을 가꾸는 부모님이 오셨는데... 우리 집 화단은 잡초로 무성하다. 비가 자주 오더니 뒷마당도 난리가 났다. 이렇게 잡초와 싸울 거면 상추라도 심어라, 호박이라도 심어라 한 마디씩 하신다.



그러나 내게는 도대체 그런 것을 키울 마음이 들지 않는다.










요즘 단체 카톡 중의 한 곳은 텃밭 가꾸기에 삼매경이다. 뒷마당에 무엇을 심었느니, 새로 텃밭을 만들었다느니, 상추, 미나리, 바질 등등 무슨무슨 모종이 있는데 좀 나눠줄까라느니, 열심 관리했는데 손도 못써보고 이미 죽었다느니 등등등



오늘도 단체 톡이 부산했다. 직접 키운 부추를 나눠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부추김치도 만든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상추도 나눠줬는데 신기하다. 다들 텃밭에 진심인 걸까?



당연히 나는 모종도 하나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직접 키워서 만들었다는 음식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왠지 나도 모종을 심고 키워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고도 그것을 기르는 수고로움을 알 것 같아서 만들어준 음식도 받지 못했다.




분명 우리 집에도 정원을 뺑 두르고 있는 넓은 화단이 그리고 널찍한 뒷마당이 남아도는데도 불구하고 저절로 고개를 절래 흔든다. 난 절대 손댈 수 없지.



역시 안 되겠다. 사실 얼마 전 오일장에 갔다가 토마토 모종이라도 살까, 집에 남은 상추 씨앗이라도 뿌릴까 고민했었다. 토마토는 너무 좋아하는데, 상추도 여름에 밥만 싸 먹어도 정말 맛있는데, 여름에 된장국과 싸 먹는 호박잎도 얼마나 맛있는데 그 세 가지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물론 있으면 잘 먹는다 그러나 없어도 산다.






요즘 주 3일을 잔디 깎기와 잡초 뽑기에 열중하고 있다. 잡초가 자라는 곳에 농작물을 심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잡초가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정원을 매번 정리하다 보면...



농작물은 쳐다도 보고 싶지 않아 진다. 당장이라도 마트에 가서 상추도 사 먹고 토마토도 사 먹고 그래야겠다. 암, 그게 낫지!



어서 화단과 뒷마당에 잡초라도 못 자라게 제초제나 뿌려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어제저녁에 멜론을 먹었다. 멜론에서 씨가 정말 많이 나왔다. 순간 이것을 화단에 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서 당장 씨를 들고 화 단으로 갔다. 작은 삽으로 땅을 파고는 파묻었다. 원래 정석대로라면 씨를 한 알 한 알 간격을 두고 심어야겠지만 나는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몇 개씩 넣었다.



그러면서 괜스레 기대가 되었다. 이 씨앗들이 자라서 모두 멜론이 된다면 올여름에는 멜론을 실컷 먹을 수 있으려나?



멜론이 가득한 텃밭을 상상하며 잠시 행복한 순간이었다.





씨가 어마어마한 멜론이었다




그 후로 정원을 바라볼 때면 나도 모르게 멜론 먹을 생각에 설레는 것을 느끼고 아주 잠시나마 텃밭의 꿈을 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들 이런 마음으로 시작한 거였어? 이렇게 가벼운 마음이었더라면 나도 한번 시작해 볼걸 그랬나 보다.



자~일단 멜론이 과연 씨앗이라도 틔울 것인지 기다려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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