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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생각나는 여름날 추억

봉숭아물들이기

by Blair

정원에 꽃이 피었다. 정원에는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때마다 다양한 식물이 꽃을 피우고 있다. 봄이 오면 수선화가 제일 먼저 피고, 담장에 바로 붙은 벚꽃나무가 피고 그 후에는 철쭉과 장미가 차례대로 핀다. 그러면 여름이 온다.



여름이 오고 꽃이 피는 것은 민들레뿐이었다. 매일 정원곳곳 올라오는 민들레는 정말 끈질긴 생명력이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좋으련만 곧 하얗게 변해 씨앗을 뿌리기 때문에 그전에 뽑아놓는다. 여름이라 그런지 꽃 대신 매실이 주렁주렁 열렸었다.



오늘 아침 창밖을 보며 참 덥다고, 벌써 이렇게 덥냐고 생각하면서 정원을 봤는데 못 보던 꽃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난봄 엄마가 심어놓고 간 봉숭아다. 신기하게도 하나의 봉숭아에 색이 다른 꽃이 여러 개 올라왔다. 며칠 지켜보니 처음엔 아주 연한 분홍 잎이 올라왔고 그다음엔 진한 분홍잎이 올라왔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하얀 봉숭아 꽃도 있다.



이 더위에도 무럭무럭 잘 자랐구나.

참 기특했다.




봉숭아조차 더워보인다








봉숭아를 보니 어릴 적 여름밤이 생각났다.



매년 여름밤 어느 날에는 엄마가 봉숭아 꽃과 잎을 따오셔서 빻아서는 손톱 위에 올려주셨다. 재료는 겨우 봉숭아 꽃과 백반 그리고 비닐과 실만 있으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엄마는 마늘 빻을 때 쓰는 절구에 봉숭아 꽃과 잎을 넣었다. 그러면 내가 콩콩 빻으면 초록색보다 더 진한 색이 남는다. 그러면 그곳에 백반을 추가하고 잘 섞이게 조금 더 빻아준다. 다 빻은 그것을 손톱 사이즈에 맞게 조금씩 올려놓는다. 그러고 나서는 비닐을 잘라 실로 동여매면 끝이다.



늘 늦은 밤이 돼서야 이루어지는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더 일찍 봉숭아를 손에 올려놓으면 너무 답답해서 바로 빼고 싶어 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잠자기 직전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면 되는 것이었다.



열 손가락에 비닐을 하나씩 잘 감긴 것을 확인하고 잠을 잘 때는 손을 가슴과 배 사이에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뭘 그렇게 격하게 움직이며 잤나 싶을 정도로 열 손가락 중에 한, 두 개만 비닐이 남아있고 모두 풀려서 어디론가 사라져 일디. 아침이면 사라진 그것들을 찾는 것이 일이었다.



매년 손톱에 물든 정도가 달랐다. 어느 해에는 빨갛고 옅게, 어느 해에는 진하고 검붉게 들고는 했다. 개인적으로는 진하고 검붉은 것이 더 예뻤다. 어차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이 조금씩 옅어지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발톱에도 봉숭아 물을 들였다. 발톱은 손톱만큼 빨리 자라지 않아 첫눈이 올 때에도 거의 조금씩은 늘 남아있었다.




엄마와 함께하던 소중한 여름날







봉숭아가 뜨거운 햇빛에 사라지기 전에 아이와 봉숭아물을 들여보기로 했다. 봉숭아잎과 꽃을 따고 백반 대신에 소금을 넣기로 했다.



어릴 적 엄마는 분명 척척 빻고 딱딱 올려줘서 금방 끝냈던 것 같은데 이 초보엄마는 봉숭아 물들이기가 처음이라 버벅거렸다.



봉숭아를 넣고는 잘 빻아야 하는데 집에 절구도 빻는 도구도 없어서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빻은 봉숭아를 손에 올려놓고 딱 감싸기가 어려웠다. 비닐로 묶어놓은 손톱 위 봉숭아는 묶어놓으면 이리저리 한쪽으로 쏠리거나, 아이는 비닐이 답답하다며 소리 질렀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아이 손에 비닐장갑을 하나 더 끼우고 잠을 재웠다. 새벽에 아이의 손을 보니 장갑은 이미 벗겨져있었고, 아침이 되어 깨우니 이미 손의 절반 가까이 비닐은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마침에 해내었다. 아이의 열손가락이 빨갛고 곱게 물들었다. 아이는 겨우 봉숭아 꽃과 잎을 빻아 올리고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빨갛게 변한 손톱이 신기하다고 했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자꾸만 엄마랑 봉숭아물을 들이던 그 여름밤이 생각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날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약간 고추장 느낌이 나기도 한다 ㅎㅎ




오늘은 아주 오랫동안 내 기억에 있던 그 순간을 아이에게 전해준 날이다. 내가 엄마와 함께 하던 그날을 떠올리며 추억하듯 앞으로 아이에게도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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