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집에 손님이 오셨는데 레드향을 선물로 가져오셨다. 그동안 제주에 와서 내내 귤도 아닌 한라봉, 레드향, 황금향 등등을 나오는 시점마다 종류별로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선물만 하다가 내가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제주에서 제대로 먹어본 적 없는 값비싼 귤 친구들을 드디어 나도 먹어볼 수 있게 되었다. 집으로 귤 박스를 들고 오는 손님에게 인사를 드리니 나에게 건네며 '레드향'이라고 말해줬다. "아니 이런 귀한걸"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별로 친하지 않은 관계라 이런 말을 하니 조금 부끄러웠는데, 값비싼 과일을 선물 받게 되니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 글을 쓰며 어제의 기억을 되감아보니 설마 내가 레드향을 보고 많이 흥분한 모습을 보인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제주에 오면 레드향, 한라봉, 황금향 등등 값비싼 귤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양심 코 공짜로 먹으려던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우리처럼 뜨내기들은 귤조차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트를 전전하다 길거리 귤을 사 먹다가 혹은 전통시장에서 노지 귤을 사 먹는 그런 뻔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레드향이라니요!! 이 귀한걸 어떻게 제가 먹을 수 있겠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레드향 선물을 갖고 오신 손님과 함께 먹어보고자 꺼냈는데!! 와, 이렇게 귤보다 조금 더 발그스름하고, 커다랗고 단단한 과일이 레드향이라는 말씀인 거죠. 딱 꺼냈을 때 껍질이 단단한 걸 보니 왠지 모를 신선함이 전해졌는데 와... 귤껍질을 깔 때와 달리 레드향 껍질을 까자마자 풍기는 향기가 얼마나 새롭던지, 그 새콤달콤한 향긋한 향기에,,, 껍질을 까는 내내 어지러웠담 말이죠. 껍질을 까서 레드향 한 조각 한 조각 분리해서 접시에 올리는데! 와! 레드향 한 개가 얼마나 큰지! 레드향 하나로 작은 접시가 꽉 찼습니다.(나도 모르게 나오는 존댓말)
한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 풍기는 그 달콤한 맛과 향! 뇌리에 박히는 맛! 이게 레드향이구나! 아마도 처음으로 먹는 레드향을 꽤 맛있는 것으로 먹어서 그랬는지, 그 참 맛을 오늘 제대로 느끼고야 알았습니다. 레드향의 진가를! (호들갑 호들갑)
이렇게 쓰다 보니 너무나 촌스러운 나의 모습. 레드향은 선물은 처음이라서...
실은 엊그제 노지에서 따온 듯한 한라봉을 앞집에서 가져다주셔서 정말 정말 맛있게 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레드향을 한입 먹고 정신 차렸을 때, 한라봉을 먹으며 감탄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분명 귤만 먹던 내가 한라봉을 먹으니 진짜 맛있었는데, 그 새콤함... 역시 한라봉이구나 싶었는데 레드향을 먹는 순간. 그 모든 맛은 잊히고 레드향 맛만 남다니!!! 이런 내가 웃겼다. 너무... 속물 같아서. 음식의 맛을 사실 잘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내가 먹은 것들이 고만고만한 수준의 평범한 것들이라 그랬나 싶기도 하고.
이걸 어쩌나 이미 레드향을 맛보았으니 내가 다시 한라봉과 귤을 맛있다 느낄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신선하고 달콤한 과일을 알게 되었는데 내가 그냥 일반 '귤'을 다시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인간은 너무도 간사해서 절대로 이전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나는 그냥 귤도 맛있게 먹는 서민인데 괜히 레드향을 선물 받아 입만 고급화되어서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 뭘 걱정할까? 원래부터 레드향 따위는 몰랐다는 듯이 다시 그냥 귤을 맛있게 먹으면 되지 뭐.
처음 제주에 와서 마트에서 사온 귤을 먹으며 제주에서 먹는 귤은 다 맛있는 거 아니었어??라고 떠오르던 생각과 노지 귤을 선물 받아먹었을 때 역시 제주도 귤은 진짜 맛있어! 그리고 한라봉을 먹었을 때 뇌리에 스치는 그 새콤달콤함. 그리고 이번에 레드향을 먹으며 신선함과 달콤함을 느끼는 순간. 어쩌면 나에게는 다양한 귤 종류의 각각의 맛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귤은 귤인데 다 같은 귤이 아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