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책을 보지만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글자가 읽히지 않은 채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멍하니 앉아있어도 배는 고파와 라면을 끓인다. 상의를 입은 채 어질러진 방 안에서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는 자영의 표정에는 영혼이 없다. 외로워서 만났지만 건조한 섹스는 인간성을 더 상실시킬 뿐이다. 공무원은 못되더라도 사람답게는 살라는 남자친구의 마지막 말은 주인공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명확히 알려준다.
세상에 발을 딛고 서있기조차 힘든 자영에게 가느다란 빛처럼 나타난 현주. 달리기를 하는 현주의 모습은 무기력한 자신의 삶과는 달리 살아서 퍼득인다. 어느 날 현주의 뒤를 따라 뛰어가던 자영의 모습은 살고 싶다는 처절한 몸부림 같았다. 사실 현주가 서있는 곳도 자영과 다르지 않다. 작가를 꿈꾸는 자영은 출판사 직원으로서 다른 작가들을 만날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 영혼이 빠져나가도 그나마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달리기를 할 때다. 숨이 막힐 때까지 뛰다 보면 모든 신경은 오직 몸에만 집중된다. 과거의 후회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사라진다. 그 순간만큼은 오히려 숨 막힌 세상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다. 그리고 달리기만이 그녀에게 노력의 결과를 보여준다.
‘이상형이 누구냐?‘는 상사의 물음에 나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자영. 세상에 대한 반항인지 현주에 대한 그리움인지 아니면 불온한 욕망인지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렇게 상사와 관계를 가지는 자영을 보며 이유 모를 불편함이 찾아든다. 어떤 감정은 인간 사회의 수많은 모순이 겹쳐져 불편함의 원인을 쉽게 알 수 없다. 뒤엉키고 희미한 내 불편한 감정의 미로를 헤쳐가다 보니 그녀의 신념이 보인다. 같은 세상을 살아도 서있는 곳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피부에 느껴지는 바람의 세기도 다르다. 어떤 곳은 비옥한 토양이고 어떤 곳은 메마른 땅이다. 자영이 서있던 곳에서 자라난 그녀의 신념은 험난한 세상의 돌부리에 부딪히고 넘어져 까맣게 멍들었고, 사람들의 온도가 다른 시선에 단단하게 말라버렸다. 자영은 상사와의 부적절한 관계에도 의연하다. 친구의 선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자신과 다르게 사회에 잘 적응한 친구를 보며 자괴감이 들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공감은 되지 않고 마음도 편치 않다.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대하는 태도와 그녀의 선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지 모르겠다. 살아갈수록 모르는 것은 많아진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은 옅어진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다양성을 알게 되고 사회의 모순에는 관대해졌다. 이상한 것은 사회는 원래 부조리하다는 편견이 오히려 사회에 대한 책임을 면책시켜 줬다는 점이다. 세상은 원래 그렇다면서 사회의 부정을 용인한다. 사회의 모순을 인정해 버리고 나니 남는 것은 개인에 대한 책임뿐이다. ‘잘 살아야 한다.‘나 ’ 착하게 살아야 한다.‘ 혹은 ’세상을 아름답게 봐야한다.‘는 둥의 나의 오래되고 무의식적인 욕심과 편견들은 가끔 사회와 사람에게 각각 다른 잣대를 내밀게 한다. 사회의 부조리는 마주할 때는 ‘세상 원래 저런데 어쩌겠어?’라며 쉽게 용인하거나 단념하면서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마주할 때는 ‘왜 저렇게 밖에 못하나?‘며 아쉬워한다. 심할 때는 ’사람들이 원래 저렇지, 뭐!‘라며 실망하고 혐오한다. 나는 자영에게도 나만의 편향된 잣대를 들이민 듯하다. 그래서 그렇게 그녀의 신념이 불편해 보였나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영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도 나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정말 소중한 사람들에게 들이미는 잣대는 엄격하다. 다른 곳에 서있는 친구의 호의나 엄마의 조언에는 차갑기만 하다. 상처받기 싫은 그녀가 만들어놓은 울타리가 너무 촘촘해서 다른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 그나마 현주에게 기댈 수 있었던 것은 그녀도 자영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회사에 떠도는 구설수에 아무런 해명도 없이 나와버린 것을 보면 세상에 대한 기대는 말라있다.
고시생과 작가지망생의 고뇌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말하는 듯 하지만 그 톤이 강하지 않다. 감독은 영화 속에 담긴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사회에서 도태되 가는 아픈 청춘들의 현실을 덤덤히 카메라에 담아냈다. (사실 난 감독의 의도를 전혀 읽지 못한 듯하다. 이 글은 그저 내 감정들의 낙서에 가깝다)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은 참 살기 좋은 나라였다. 거리는 예전보다 깨끗해졌고 곳곳에는 공원들이 생겨 산책하기도 좋다. 여전히 안전하고 의료시스템은 탁월하다. 한국의 문화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갔고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은 세계적이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고른 발전을 이룬 나라는 거의 없다. 수십 년 만에 이룬 눈부신 쾌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OECD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노인 빈곤율도 최 상위권이다. 얼마 전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는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민들의 뼈와 살을 갈아 넣어 이루어낸 초고속 성장은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그보다 커다란 정신적 빈곤을 가져왔다. 획일화된 교육과 경쟁을 부추기는 성과 지향의 사회시스템은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불러왔다. 내가 ‘살기 좋다’고 느꼈던 이 나라는 ‘살기 편한’ 나라였다.
이 모순적인 세상에서 내가 자영에게 왜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하냐고! 왜 그렇게 나약하냐고! 묻는 것은 욕심이다. 어쩌면 자영의 엄마가 제시했던 답안들과 친구의 호의와 걱정들은 그녀에게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기도 힘들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었을지 모른다. 그저 각자 서있는 곳이 달랐고 보이는 것도 달랐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들도 다르다. 좋은 마음이라도 각자의 정답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순간 폭행이 되기도 한다. 호의도 상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호의가 아니다. 그러나 서로를 마음속 깊숙이까지 이해하고 공감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치열하다. 사회는 인간에게 너그럽지 않고 타인의 가벼운 선의는 불편해진 세상이 됐다. 그래서 오롯이 혼자서 버텨내야 하는 시대, 점점 고립되어 ‘인간성마저 상실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답을 찾기 더 어려울지 모른다. 우리가 찾는 것이 ‘파랑새’ 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스토리보다는 내 감정에만 집중했다. 영화가 말하는 것보다는 내가 보고 싶은 것들만 보였다. 요즘 보는 모든 영화들이 다 비슷하게만 보인다. 큰일이다. 중증의 확증편향 아니면 단단한 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