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심장을 가진 기획자를 꿈꾸자
내 공을 받을 자격 있어?
긴 노란 머리카락을 정수리 끝에 끈으로 말아 올린 잘생긴 남자가 레알마드리드 훈련장에 처음으로 발을 딛는다. 훈련하던 지단과 호나우두가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는다. 첫 훈련이 끝난 후 선수 몇이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것 같아?"
"솔직히 모르겠어. 예상이 안 돼. 우리랑 잘 맞을지 모르겠네."
다큐멘터리에 기록된 데이비드 베컴의 레알마드리드 첫 훈련 모습이다. 팀을 옮긴 선수에 대한 첫 반응은 대개 이렇다. 베컴처럼 실력과 인기가 입증된 선수도 예외는 없다. 팀의 모든 사람이 새로 온 사람에 대해 내 공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경기에 뛸만한 수준인지, 내 경쟁 상대인지를 본능적으로 살핀다.
프로
회사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회사라는 팀에 입단을 한다. 돈을 받고 회사원으로서 게임에 출전한다. 출전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얻는 것이 먼저다. 축구선수가 감독, 동료, 팬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것처럼.
"축구산업에서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해요?"
축구산업 아카데미 강의를 진행하는 5년 내내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앞으로 닥쳐올 어떤 역경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의지 가득한 눈 안에 내가 담겨있다. 20년 전 내가 앞에 선 강연자를 담았던 그 눈이다. 강연자를 보는 것이 아닌 미래의 자신을 바라보는듯한 눈. 축구공을 쫒는 순수한 시선.
"축구쪽 일이 박봉이고 힘들다던데 지금도 그런가요?"
어떤 대답을 해줘야 좋을까 망설이다 이렇게 말해주곤 한다.
"돈을 내고 축구를 볼 때는 즐거웠는데, 돈을 받고 축구를 위해 뛰고 일해야하는 거 잖아요? 완전히 프로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감각은 있습니다. 그게 첨엔 즐거움으로 다가와요. 나중엔 축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없구나하는 실망감이 더해집니다. 그게 상대적으로 적은 월급보다 더 큰 현타를 불러옵니다."
그 말을 듣고도 눈을 반짝이는 수강생들을 보면서 서울 종로 축구회관에서 1년 동안 치뤄진 내 입단테스트를 떠올렸다.
입단테스트
"너는 글쓰는 기본이 안 돼있어"
가림막 사이로 새어나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러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출력된 보도자료가 공중에서 찢어져 여러갈래로 나뉘다 쓰레기 통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미처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못한 찢겨진 종이 하나가 내 발 끝에 내려앉았다.
나는 인턴이었다. 사람들이 시선을 거두고 다시 자신의 일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쓰레기 통에 들어간 보도자료가 신경쓰였다. 알렉스 퍼거슨의 축구화를 맞은 베컴의 심정이 이럴까하고 생각하다가 그 생각을 지웠다. 베컴의 ㅂ도 입에 담기 어려운 입단테스트 중인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베컴은 프리킥이라도 기각 막히게 찼다. 나는 글을 베컴처럼 기가막히게 쓰고 나면 부장님을 퍼기라고 부르리라고 다짐했다. 아직 내가 쓸줄 아는 건 몸 뿐이니까.
"아직도 사투리를 쓰네. 기자들과 말을 할때 표준어로 소통을 해야지"
그럴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내 자리가 없을까봐. 인턴 계약기간은 이제 5개월 남짓 남았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퍼기...아니 부장님이 기본이라고 했던 부분들을 보완하기 시작했다. 글을 잘 쓰려면 더 많이 읽고 생각해야 했고 또 자주 써야했다. 내 등 뒤에 앉은 사수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보고 따라하기도 했다. 27년 동안 익힌 말의 높고 낮음을 억제하며 표준어를 체화했다. 팀에 녹아들어야했기에.
그렇게 프로축구연맹 모든이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공을 쫒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었지싶다. 다음날 나가야 하는 보도자료를 전날에도 컨펌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할테니 다시 써서 문자로 보내놓으라는 부장님의 말을 듣고 사수에게 걱정을 털어놓는 날이 많았다.
"걱정마. 홍섭씨, 내가 컨펌 받아줄게. 부장님 저러실 때 있어. 별일 아니야."
나 때문에 일찍 일어나 내가 해야할 일을 대신 정리해주는 사수를 보며 멋지다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살 길이 없을까하는 생각이었다. '지금 뭘 해야할까. 홍섭아. 어떻게 해야 니가 팀에 있을 수 있을까.' 그러다 한 생각이 떠올랐다.
'공을 아무도 줄 생각이 없다면 공을 받을만한 곳에 어디든 서 있어야겠다.'
동료
나의 전술적(?) 필요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팀의 일 뿐 아니라 모든 선배들의 일을 도와줄 요량으로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평일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에 잔업을 하는 선배가 보이면 일부러 주말에 출근을 했다. 처음에 선배들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야. 집에 좀 가. 넌 데이트도 안하냐. 주말인데 왜 나왔어?"
"주말에 할 것도 없고 배도 고파서요. 선배님, 혹시 일 도와드릴거 있으면 알려주세요. 밥 얻어먹는 대신에 일 도와드릴게요"
실력이 없으니 모두에게 잘 보이려는 나의 뻔한 전략이 훤히 보였겠지만 선배들은 감사하게도 그런 날 받아줬다. 오히려 주변 시선이 없으니 좀 더 편하게 일을 알려줬다. 나는 그들의 일을 도우며 그들이 가진 기량을 훔칠 수 있었다. 자료를 어떻게 만들면 보기 편한지, 사업 기획은 어떻게, 왜 진행하는지. 숫자는 어떤 상황에서 써야 효과적인지. 그렇게 애를 쓰던 어느날. 같은 팀 과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홍섭씨, 노트북 고장 났다며? 이거 좋은건 아닌데 내가 새로 사서 조립한거야. 집에서 막 쓰기엔 충분할거야. 계속 열심히 해"
작전 지시를 엿듣고 첫 기획을 하다
잘 뛰어다닌다. 체력이 좋다. 기술은 없지만 요령이 없어 좋다. 선배들의 평가였다. 우리 팀의 감독인 부장님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가 궁금할 무렵. 아이폰을 만지작 거리던 부장님이 사수를 부른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트위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던 사수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페이스북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페이스북은 두 사람 모두 익숙하지 않아보였다. 언론사 국장 출신의 부장님은 뉴미디어인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야구에 비해 기존 미디어의 관심을 적게 받고 있는 프로축구의 상황을 해결할 방책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심결에 들은 A팀 작전회의를 가만히 듣다 보니 내가 그렇게 찾던 내 역할이었다. 누구도 잘 모르지만 언젠간 해야할 일.
작전 지시를 직접 내리진 않았지만, 나는 훔쳐들은 작전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외부 강연을 듣고 외국 서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프로축구연맹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 운영안을 들고 부장님 책상에 찾아 갔을때 부장님 마음이 어땠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도 없었을지 모른다. 허락의 말이 떨어진 그날 나는 매진된 경기장의 입장권을 구한 마음이었다. 아니다. 난 플레이어니 구두 입단 계약을 얻어낸 기분이었다가 더 정확하겠다. 얼마 뒤 나는 직원이 됐다. 제대로 된 돈을 받고 축구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진행 결과는 좋아서 아시아축구연맹(AFC) 세미나 때 아시아 축구팀들 대상으로 성공사례 발표를 해달라는 요청도 받았었다.
축구화 끈을 꽉 매듯 마음을 다잡자
그때 나는 축구 일의 기본을 배웠다. 축구 일을 하기 위한 입단테스트 내내 나는 동료들의 장점을 눈에 담아 훔쳐야 했고 내게 내린 지시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할 수 있음을 부던히 티내야 했다. 당신이 지금 그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면 나는 당신을 응원한다. 그저 티나지 않는 응원이 필요할 테니까. 축구를 돈 내고 보는 것이 아닌 축구를 돈 받고 하기로 결심한 것은 남의 강요에 의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응원을 할 수 있었지만 직접 뛰기로 했으니까. 그러니 뭐든 배우려는 자세로 증명해낼거라 믿는다.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감각을 몸으로 따라가며 경험하다 기획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구나 깨달은 경우다. 소비자로서 돈과 시간을 써가며 경험한 것들도 물론 많은 도움이 됐었다. 프로로서 돈을 받고 일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부담감이 나를 짓누를때마다 나를 지탱했던 것은 일에 대한 애정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 나는 늘 내가 가진 호기심과 상상력을 최대치로 써왔다.
그렇다. 언제나 문제는 상상력의 결핍이다. 호기심 없는 사람은 제대로 알아보며 살지 않는다. 현상을 피상적으로 본다. 혹은 맹목적으로 보기도 한다. 일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존경하며 따라하고 싶은 프로들은 늘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결과를 만들어내더라. 프로라는 자각이 가장 중요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린 선택을 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동일선상 But 다른선택
다들 잊고 있지만 세징야도 메시도 펩 과르디올라도 베컴도 조광래 대표도 모두 축구 팬으로 시작했다. 아버지 손을 잡고 경기장을 가던 그날부터 여러번의 용기와 선택이 이어져 그들의 현재를 만든 것이다. 돈을 내고 보지 않고 돈을 받고 하기로 했으면 모든 수를 동원해 잘하자. 여러분이 그 자리에 맞게 성장하면 어느새 여러분의 자리가 축구장에 있을 것이다. 우리 안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최대한 꺼내보자. 기획이라는 공을 제대로 굴리기만 하면 축구장엔 기회가 가득했다. 이건 내 경험담이다. 반면, 상상력이 다소 부족하거나 상상하기 귀찮아진 이들은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거 안돼. 일 좀 만들지 마라.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공을 건네면 그들은 공을 받고 어찌할바 모르거나 백패스를 하곤 했다. 그들의 상상력은 아마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먼저 가닿아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후배가 다치는 것이 걱정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기획자에겐 때로 용기가 필요하다. 받는 돈 이상의 용기가.
"용기란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다"
두개의 심장은 박지성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