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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영 Jan 02. 2024

28. 기다림과 다가옴

일상에서 떠올린 단상

깊은 잠에서 깨어난 이른 아침.


핸드폰 등록된 일정을 뒤적여 본다. 제법 빽빽하다. 삶의 흐름 속에 돌출되어 있는 특별한 약속들, 계획들이다. 기다려지는 일정이 있는 반면, 어떻든지 견뎌내야 하는 일정도 보인다.


삶을 뒤돌아보니 가슴 두근거리는 기다림이 제법 있었다. 어렸을 적의 대표적인 기다림은 소풍, 수학여행이 아니었을까. 평소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보고, 평소 잘 먹지 못하던 김밥과 음료수를 먹을 수 있었으니까.


하필 어느 소풍 전날. 어머니가 몸져누우셨다. 매번 싸주시던 맛있는 김밥대신, 평소의 도시락에 계란 프라이를 하나 얹어주셨다. 하필 그 소풍날 점심. 담임선생님이 어느 집 김밥이 맛있는지 보겠다며, 군데군데 둘러앉은 아이들이 펼쳐 놓은 도시락을 둘러보시면서 김밥 한알씩을 드시고 계셨다. 부끄러워 도시락 뚜껑을 열지 못하던 내 차례가 되었고, 도시락 뚜껑을 마지못해 열었을 때 선생님의 당황한 모습과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이 지금도 선명하다. 기다림의 경험은 보통 기분 좋은 추억이 되지만, 가끔 살짝 어긋나기도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무언가를 간절히 기대하던 기다림이 있었나 싶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하고 이사할 날짜를 잡아 놓았을 때, 첫 차를 장만하고 인도받는 날을 기다릴 때 정도. 오히려 어릴 적 소풍을 기다리던  기다림의 설렘보다는 밋밋함이 큰 것 같다.


최근 오랜만에 설레었던 기다림은 아내와 함께 관람기로 한 '호두까기 인형' 발레공연이었다. 기다림은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로 다가왔고, 공연장으로 가는 길은 쏟아지는 눈 때문인지, 눈장난을 하는  아이들 때문인지, 제법 연말연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공연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관람객으로 넘쳐났다. 연말을 아름다운 발레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무리하는 것은 멋진 일정인 것 같다.


드디어 조명이 꺼지면서 고대하던 공연이 시작되었고, 공연 속의 발레리나, 발레리노들의 춤사위는 너무 아름다웠고 환상적이었다. 세상 아름답다고 감탄할 만한 것은 다양하게 존재지만, 그중 고대로부터 시작되고 발전되어 온 인간의 예술적인 동작도 필히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듯하다.


기다림에 설렘과 가슴 두근거림이 있다면, 오지 않았으면 하는데도 다가오는 다가옴에는 두려움이 있다.


과거를 되짚어 보면, 몇 가지 경험이 떠오른다. 젊었을 때의 군입대 날짜, 직장에서의 영업실적 관련 회의 일자, 업무상 참석해야 하는 골프모임 약속 등등.


영업실적이 좋지 않을 때 열리는 회의 일자는 어떻게든 견뎌야 하는 일정인데, 어느 순간 다가온다. 회의 시간 내내 죄송한 마음에 상사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렵고, 부끄러운 마음에 주변 동료를 피하고 조용히 자리만 지키게 된다. 회의를 마치는 순간, 후다닥 뛰쳐나오며 일정의 다가옴이 지나갔음에 안도 회한을 토해낸다.


기다림과 다가옴의 연속선 상에서 시간이 흐르고, 삶의 두께가 쌓여 간다. 특별한 일정들이 연륜이라고도 불리는 나무의 나이테 같은 동심원을 만들어 낸다. 봄. 여름. 가을 같은 기쁨이, 겨울 같은 고통이 차곡히 쌓여 하나의 사람을 만들어 간다. 또 한 개의 나이테를 늘려버린 지금. 수시로 변화하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고목과 같은 꿈같은 온전함을 기대해 본다.


출처: 네이버(밀레,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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