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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영 Apr 27. 2024

37. 편안한 사람이 좋다

일상에서 떠올린 단상

어제는 비가 제법 내렸고, 오늘은 4월인데도 꽤 으슬으슬하다. 불어대는 바람에 줄곧 여미지 않았던 점퍼 단단히 여미고,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다.


분주한 길거리를 걷는다. 아무 생각 없이 건물에 다닥다닥 붙은 간판 위의 글자를 읽기도 하고,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하며, 옆 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의 모양을 살펴보기도 한다.


약속시간이 여유가 있어 버스를 타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는 걸음은 한없이 여유롭다.


약속한 식당에 먼저 들어와 앉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도 없고 공간은 고요한데, 올드팝송이 잔잔히 흘러나오고 있다. 순대국밥집에서 흘러나오는 올드팝송 왠지 어색하기도 했으나, 오늘의 날씨와 잘 어울려 숨겨져 있던 나의 감성을 자극한다.


구석자리에 고개 숙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종업원과 반대편 멀리에 앉은 나만 있는 빈 공간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음률은 오롯이 나를 감쌌다가 식당문 밖으로 사라져 다.


반가운 얼굴이 식당문 안으로 불쑥 들어오자마자 나를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가지고 성큼성큼 다가온다.


같은 직장, 같은 부서에서 합을 맞췄던 후배인데, 일하는 스타일과 성격이 잘 맞아 즐겁게 일했었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도 가끔 얼굴을 마주한다. 그때와 달라진 건 선. 후배에서 형. 동생으로 호칭이 바뀐 것이다.


상대방을 형. 동생이라 잘 부르지 못하는 두 사람이 세월이 어지간히 흐르고 나니 서로 편안한 사이가 되어 자연스레 형과 동생이 된 것이다.


젊었을 때나이 들었을 때의 '친구 사귀기'는 좀 다른 듯하다. 젊었을 때보다 나이 들었을 때의 친구 사귀기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대화 속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해야 하고, 내가 손해보지 않는 적정선을 고민해야 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수시로 확인해야 하고 사후 관리도 잘해야 한다.


이러한 번거로움 없이, 옷장 속의 낡았으나 마음에 들어 자주 입던 편안한 옷을 꺼내 입듯, 세월이 흘러 편안해진 친구를 만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큰 기쁨 중 하나이다.


어디서 만날지를 고민하지 않고, 동네 어디에 있는 흔한 순대국밥집에서 만나 국밥 한 그릇 하고, 또 그 근처 어디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가벼운 웃음에 한 손 살짝 들어 인사하고 헤어지는 그 편안함이 좋다.


오늘도 우리가 만나지 못한 시간 중 일어난 일들을 업데이트하고 그 일들에 숨어있던 힘듦과 즐거움을 공유한다. 앞으로의 계획들도 꺼내어 놓고 의논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매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다'로 귀결된다. 후배는 "그래서 전 가끔씩 복권을 사요"라며 씩 웃는다. "그러게..." 나도 따라 웃는다.


커피를 마시고 일어선 거리엔 햇빛이 비친다. 만나기 전 거리에서 단단히 여몄던 점퍼를 다시 여밀 필요는 없다. 지하철역 근처 복권판매대에서 복권을 사들고 지하로 사라지는 후배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 돌아선다.


우리는 그렇게 또 만날 것이다. 편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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