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역설적이고 결말이 충격적인 영화였다. 결코 보통의 가족이 될 수 없는 가족의 모습. 보통의 가족에게선 있을 수 없는 한참 비정상적이고 결핍된 가족이 아닐 수 없다.
두 형제 모두 아이들을 얼마나 잘못 키웠으면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이 되었을까. 돈이라면 범죄자도 서슴지 않고 변호하는 속물 변호사 아버지와 어린 새엄마와의 재혼이 형의 딸 혜윤이를 비뚤어지게 했다면, 학교 폭력을 경험하고 분노를 폭발한 동생의 아들 시호가 저지른 노숙자 폭행은 둘 다 어린 아이들의 철없던 행동이 아니었다. 이성이 강하게 작용했고,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묻지마 범죄였다. 그들은 부모가 막아줄 거란 확신이 있어 두렵지 않았고 죄책감조차 없었다.
아이들이 예상했던 대로 상황은 흘러갔다. 아이들은 유전무죄 무전무죄의 악습을 그대로 답습했다. 부모란 이름으로 아이들의 잘못을 감싸주고 덮어주는 잘못된 부성과 모성에 대한 비판과 경각심을 주었지만 인간의 추악한 본성과 마주한 참 씁쓸한 영화였다.
문제 아이 뒤엔 문제 부모가 있다. 아이가 엇나가고 잘못 되는 것을 방치하고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무관심한 방임 부모이거나 공부만 잘 하면 모두 괜찮다는 잘못된 가치를 심어준 부모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모든 부모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그에 맞는 인성과 인격을 제대로 갖춘 자녀로 양육시킬 것을 기대한다. 기업의 총수의 자녀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때 비난의 잣대가 더 크다. 사회에 기여한 만큼 자식들이 최소한 기본 소양도 갖추지 못한다면 부모를 비난하게 될 수밖에 없다.
노숙인을 폭행해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고도 죄책감 하나 없이 "오히려 사망했으니 이제 된 것 아니냐"며 반문하고, 대학에 붙었으니 차를 사달라며 떳떳하게 요구하는 딸 앞에서 아빠는 잘못 되었음을 인식하고, 아이들이 자신들의 구타 동영상을 보며 나누는 대화에 망연자실한다. 한참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나서야 깊이 고민한다.
어떻게든 감추고 싶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덮어주고 싶은 부모의 인지상정과 두려움, 부정과 모정이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도덕과 정의는 존재한다. 그걸 넘어선 범죄 행위라면 자식이라도 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자수 시키려는 형을 동생 부부는 인정하지 못하고 분노한다.
동생의 부인은 말한다. 동사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아이들에겐 마음의 감옥이란 것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노숙인에게도 살 권리가 있고, 아이들은 무참히 그걸 빼앗아갔다. 엄마가 말한 마음의 감옥에 갇힐 아이들이 아니었다. 죄에서 자유롭고 전혀 죄책감 따위는 없는 아이들로 커갈 것임이 분명하다. 처음에 자식의 범죄를 대했을 때 두 사람의 모습이 나중엔 완전히 바뀌어서 자기 아들의 앞길을 막겠다는 형을 차로 치는 반전 결말이 충격적이다.
내로남불이라고 했던가. 내가 하려고 할 땐 정의였지만 형이 하려고 할 땐 자기 자식 앞길 망치는 행위라니. 이성도 잃고 눈앞에 보이는 것도 없을 만큼 잔혹한 것이 인간의 본성일까. 자식의 범죄를 덮어준 한참을 엇나간 부성은 또다른 범죄로 이어져 그저 허탄스러울 뿐이었다.
만약 아이가 나무람 속에서 자라면,
비난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적개심 속에서 자라면,
싸우는 것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비웃음 속에서 자라면,
부끄러움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수치 속에서 자라면,
죄의식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관대 속에서 자라면,
신뢰를 배운다.
만약 아이가 격려 속에서 자라면,
고마움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공평함 속에서 자라면,
정의를 배운다.
만약 아이가 보호 속에서 자라면,
믿음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인정 속에서 자라면,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받아들임과 우정 속에서 자라면,
세상에서 사랑을 배운다.
"도로디. 로. 놀트" 의 "아이들은 사는 것을 배운다"는 글이다. 영화속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위선과 속임수를 배우고, 아이들은 그걸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다.
돈 많고 유능한 부모는 잃을 게 너무 많기에 자신이 이룬 것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 때문인지, 진심으로 자식의 미래를 걱정했기 때문인지, 그건 영화를 보고 판단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