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우리집에 오실 때면 말없이 걸레를 드시곤 TV 선반 밑이나 창틀의 먼지를 닦아주신다. 내가 멋적게 웃으면서
"먼지가 뽀얗지요?" 하면
"바쁜 네가 이런 것까지 어떻게 신경쓰냐."
하시면서 말이라도 따뜻하게 해주신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 내가 안쓰럽기도 고맙기도 한 어머님의 진심이 담긴 말씀이다.
예전의 어머님은 참 강하셔서 내겐 무서운 분이셨다. 결혼 초 어머님과 2년을 살면서 첫 아들을 낳기 전까지 모든 생활이 그저 불편했다. 25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대식구 식사 후에 설거지하는 것 뿐이었는데 아이라는 공유할 사랑체가 생기니 의기투합이 되었다. 1년 차가 되어가니 혼자서도 식사 준비를 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적응하고 2년 만에 분가했을 땐 자유를 찾은 것 같았다. 함께 살다 보니 배운 점도 많았다. 신혼이란 달콤함은 잃었지만 대신 부대끼며 살면서 가족의 끈끈한 정을 얻었다.
결혼 전에 어머님은 아버님과 버스 기사 식당을 운영하셨을 만큼 요리 솜씨가 좋으셨다. 뭐든 잘 하시는 어머님 앞에서 난 기도 못 폈는데 어느덧 결혼 30년 차가 되어가니 기세등등해지고 옆에서 많이 의지하는 든든한 며느리가 되었다. 이제 어머님은 부양해야 할 힘 없는 어르신이 되었다.
87세이신 어머님은 다리가 약해진 것과 불면증 외엔 큰 지병은 없으시다. 억척스럽게 몸을 혹사시키며 살아오신 데 비해 건강은 양호하신 편이다. 팔순을 앞둔 아버님이 10여 년 전에 먼저 떠나시고 홀로 시골생활을 하시면서도 씩씩하고 부지런히 밭일을 해내고 한시도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시골집을 정리하시고 자식들 근처로 이사 오시면서 25평 아파트에 홀로 사시는 어머님의 집은 평소에도 부지런하셔서 손 하나 갈 게 없이 깔끔하고 정리 정돈이 잘 되어있다.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 나는 두 주에 한 번은 꼭 방문 해서 함께 가볍게 식사를 하고 온다.
이젠 연로하셔서 소화력이 떨어지면서 예전처럼 많이 못 드신다. 시골에 계실 땐 혼자서도 힘든 밭일을 하시다 보니 식사를 그렇게 잘 하셨다. 이제 연세도 드시고 도심 생활에 큰 활동도 없으신 데다 초기 위암이 발견되어 수술도 하시면서 식사량이 많이 줄었다. 적당히 드실 만큼의 양 외에는 절대 드시지 않는 어머님이시다.
이번 주에 가면서 미리 봐둔 장을 꺼내서 갖고 갔다. 농사지은 배추를 주신 분이 계셨는데 배추가 물러서 얼른 담은 겉절이와 무조림과 우삼겹 찜을 해먹으려고 사둔 숙주, 알배추, 팽이버섯 등 야채와 참이맛 소스와 겨자 소스까지 챙겨갔다.
저녁 때 찜기에 올려 한소끔 끓이니 간편하면서도 푸짐한 한 끼 식사가 완성됐다. 육수를 내서 야채와 먹는 샤브샤브는 자주 드셨지만 이런 음식은 처음 본다며 궁금해하셨다. 야채를 워낙 좋아하셔서 배추와 야채에 우삼겹을 싸서 소스에 찍어드시더니 맛있다고 하셨다. 입맛이 까다로운 어머님의 입에도 잘 맞으셨나 보다. 셋이 한 근의 고기를 밥도 없이 먹었는데도 든든했다.
가성비가 좋고 쉬운 요리인데 야채와 단백질까지 고루 갖춘 건강식을 맛있게 드시니 그저 뿌듯했다. 지난 겨울엔 싱싱한 석화굴을 사서 4형제가 모두 모여 쪄서 먹고 남은 굴로 미역국까지 끓여서 드셨을 때도 무척 좋아하셨는데 효도가 별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소소한 식사 한 끼를 같이 하는 것이 작은 효도이다. 받은 만큼은 못해도 작으나마 돌려드려야 할 때이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가진 마음이 이랬겠지.'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음엔 어떤 요리를 해드려 볼까?'